네 삶에 깃든 리듬을 느껴라 - <패터슨>

자기자신의 일상에서 어떤 리듬이 '나'를 기분 좋게 하는지

by 정필년

성탄전야 연말연시. 다들 어떻게든 특별하게 보내려 애쓴다. 나도 그랬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가기로 맘먹었고, 어디 서울 번화가에 따로 약속이라도 잡아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콘서트 갈 돈을 물러 다음달부터 다닐 수영장 등록비로 썼고, 번화가로 나서지 않고 동네 근처에서 친구들과 가족들과 차 한잔 마시며 보냈다. 여느 때의 주말처럼.

직접 내린 선택에도 약간의 후회는 있다.

"너무 평범했나? 아니 초라했나?"

마침 이런 생각을 한 성탄전야에 본 영화였다.
<패터슨> (2016)



2017년 한 해를 잘 매듭짓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


<패터슨>(2016)
김혜리 - ★★★★★
평일의 예술에 관하여

1.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님이 별을 ★★★★★ 주지 않았다면 아마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리라. 내 기억으론 <매드 맥스> 이후로 별 다섯개는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대체 무슨 영화길래 이다지도 아끼시나?" 싶었다.

영화감상평에 있어 '별 다섯개'는 아마 작품감상자의 취향에 가장 잘 부합하는 영화, 미학적인 성취를 가장 탁월하게 이뤄낸 영화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좋다,

이동진 평론가는 "평론가는 온몸온맘으로 밀어주고 싶은 작품에 별 다섯개를 준다"는 말(한 80%쯤 정확한 기억)을 했었다.

김혜리기자님이 한줄평에 덧붙이는 별 다섯개의 의미는 '영화에서만 쓸 수 있는 카드card'가 아닐까. 골백번은 거듭 읽었던 기자님 말씀에 따르면 그렇다.

<패터슨>은 거기에 가장 잘 부합하는 예시영화가 아닐까 싶다.


소설에서 쓰자니 묘사하기 어렵고, 무용으로 풀어내자면 추상적인 이야기.절묘하게도 '영화'라는 예술에서만 다룰 수 있는 이야기.



2.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 州 패터슨 市의 버스기사 패터슨씨의 1주일을 다룬 이야기다. 우리나라로 치면 충청북도 천안시에 사는 이천안씨(기혼/버스기사)의 일주일 정도로 생각하면 되려나.

그러나 이 영화에 특별한 스토리-텔링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패터슨씨가 갑자기 로또에 맞아 벼락부자가 된다거나, 다니던 버스회사가 부도가 나, 패터슨이 새로운 직업을 찾는다거나 하는 극적인 사건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그저 월요일의 패터슨과 화요일의 패터슨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월요일의 패터슨과 화요일의 패터슨은 거의 비슷한 행동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혹여나 우연히 이 영화를 만나 빨려든 관객이 내 근처에 있어 "설마 이대로 반전없이 비슷한 장면만 보여주겠어??"라 생각하셨다면... ㅠㅜ...

"이런... 여태까지 영화를 서사에 의존해서 봐 오셨군요. 이해합니다. 저도 처음에 이런 영화보는 게 힘들었어요. 홍상수 식 예술영화나 영화제에서 실험적인 졸업작품을 조금씩 맛보면서, 서사 없는 영화의 면역력을 기르시면 어떨지요?"라 말해주고 싶다.

영화 끝날 때까지 스크린 안에서 연기하는 주인공 배우 아담 드라이버조차 "예 죄송합니다...저는 일요일까지 아마 비슷한 짓을 할 거에요. 그게 뉴저지에서 버스를 몰고 사는 패터슨입니다."라 사과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서사가 제거된 영화를 보려면 역시나 느껴야 한다. 타임라인을 따라 벌어지는 사건을 눈으로 쫓는 게 아니라, 화면 안에 담긴 카메라 앵글의 구도를 쫓아가야한다. <패터슨>같은 영화는 읽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한다.

3.
나는 요즘 들어 일상 안에 스며드는 권태를 제법 훌륭히 물리치는 방법을 하나 터득했는데, 그것은 바로 일상에서 리듬을 느끼는 것이다. 리듬은 박자를 쪼개면서 시작된다. 우선 하루를 쪼개보자.


나의 하루를 쪼개본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기 전에 인덕션에 주전자를 올리고 머리를 말리며 커피를 내린다. 텀블러를 오른손에 쥐고 나가 버스를 탄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를 가는 동안에 보는 풍경에서 발견하는 풍경. 매일 다른 풍경. 움직이는 사람, 멈춰있는 건물. 학교에 들어가 오늘 하루의 주요일과를 확인하고 하나씩 해치운다. 신문을 싹다 집어와 스크랩을 하고, 스크랩이 끝나면 택배를 교무실로 옮기고, 과학실의 고장난 교구를 하나씩 정리한다. 때때로 짜증이 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일에 기쁨을 느낀다. 인하대까지 열심히 걸어가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하나 배어물고 다시 오후 일과를 마치면 어느새 퇴근. 스터디를 하거나, 카페를 찾아 거기서 공부를 하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그러고 집에 들어와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잠든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나와 비슷한 하루를 보내다 잠에 들거야. 뉴저지의 패터슨 씨도 마찬가지.

중요한 건, 자기자신의 일상을 이런 식으로 써내릴 만치의 '원근감'을 내면에 확보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행동을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행동의 주체인 '나'는 행동을 패턴화 시킬 수 있다. 패턴이란 일정한 진폭 안에서 벌어지는 흐름이니, 흐름에는 자연스레 리듬이 깃든다.


패터슨은 그 리듬을 시詩로 써내린다. 당신은 어떠한가?


자기자신의 일상에서 어떤 리듬이 '나'를 기분 좋게 하는지, 불쾌하게 만드는지. 이 연습만 잘해도 건강한 행복을 만드는 게 아닐런지.


4.
우리가 <패터슨>을 굳이 2시간을 들여 봐야하는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격려'와 '응원'에 있지 않을까.

당신이 평범하고 흔해빠진 삶을 사는 것 같아 불안하고 힘들다면, 전혀 그것 때문에 힘들어할 필요 없다고. 일단 당신의 평범한 나날을 인정하고 긍정하라고. 다만 당신의 평범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것을 놓치지 말라고. 당신과 당신 곁을 서성이는 사소함의 리듬을 느끼라고. 그러다 보면 당신도 패터슨처럼 'A-HA !' 일주일을, 또 한달 일년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지 않겠냐고.


<패터슨>을 보고 따뜻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번에 얻은 온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으리라. 이번 연말연시 성탄전야에 내린 어떤 불안이나 후회를 말끔히 걷어냈다. 또한 내 평범한 일상의 리듬을 좀 더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됐다.


주인공 패터슨은 시詩를 쓴다. 영화는 패터슨이 어쩌다 시를 쓰게 됐는지를 설명해주지 않지만, 패터슨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그의 시 안에 빨려들어간다는 것 만큼은 뚜렷하게 보여준다.

시를 쓰진 않지만, 나도 마침 내 일상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문자의 힘을 빌려 기록하는 사람이라, 일상의 평범한 나날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포착하는 연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뚜렷한 성취를 얻었다는 물리적 실감이 생겼기에. 덕분에 패터슨의 일주일을 꼭 나의 일주일인양 느꼈다.


YOLO가 시대정신이 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리듬을 하찮게 여기게 됐나. 

패터슨이 추구하는 꿈은 높은 수준의 시작詩作에 있지만, 시를 쓴답시고 일상을 배신하진 않는다. 이것이 영화 <패터슨>에서 추려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덕이다.


패터슨은 시를 쓰기 위해 괴팍한 기행을 일삼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이 보내야 하고 견뎌야 하는 나날에 충실하다. 나는 "일상을 충분히 머금은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해진다" 믿는 사람으로서 패터슨이 보여주는 태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12월 1일부터 새해를 위한 루틴.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찾는 연습을 계속 이어가던 나에게, <패터슨>의 일주일은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자,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해가 바뀌어도 이어갈 건강한 화두를 만들어냈다.


2017년 한 해를 잘 매듭짓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