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로마의 역사성, 그리고 로마 공화정의 권력 분립과 신분 투쟁
김덕수 교수의 로마사 저서들은 읽어보았었는데, 같은 학교의 허승일 교수의 저서는 처음 읽어보게 되었다. 책을 집어든 경위는 이 책이 일반적 로마사 저자들과는 다른 접근을 취하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은 대부분 힘을 가지고 있는 순간만을 바라보지만, 힘이 발생하게 된 경위와 과정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힘의 표상인 강자의 위치에만 집중하고, 어떻게 그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는지는 도외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역시 로마사 전공 교수님의 짬은 다른듯 하다. 이 책은 타르퀴니우스를 축출하는 공화정의 초기 형태부터,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을 거쳐 변화하는 공화정의 마지막까지를 다룬다. 이 부분은 원수정 로마에 비해서 일반인들의 관심을 크게 받지 않는 시대이다.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이라는 국호에서도 드러나듯 로마는 원수정, 제정에서도 공화정의 형태를 버리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 이후 유럽과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로마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심의 편향은 역사를 조망하는 이유를 비껴가는 위험성을 가진다. 우리는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미래에 대처하기 위함'이라는 간단한 대답이 나오지만, 이 대답으로는 역사가 무엇인지 그 정의에 다다르지 못한다. 여기서 로마 공화정 말기의 위대한 정치가 키케로의 말을 빌린다.
"역사란 시대의 증인이고, 진리의 빛이며, 기억의 생이고, 삶의 스승이며, 옛 세계의 소식 전달자이고,..."
정의만 보면 뜻이 모호하나, 키케로는 역사를 저술하는 법칙을 통해 실마리를 던져준다.
1법칙 : 거짓됨을 말하지 말라
2법칙 : 참된 것들만 말하라
3법칙 : 역사 쓰기에서 봐주기가 있다는 의혹을 받지 말라
4법칙 : 초록이 동색이라는 의혹도 받지 말라
현재의 체험을 통해 미래에 대한 기대를, 과거의 기억에서 불러내어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할 때에 그 이야기는 '역사적 이야기'가 되어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다. - 웨른 뤼젠
공화정 이후의 로마사는 무척 매력적이나, 아우구스투스와 트라야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업적에만 집중하면 과거를 면밀히 들여다보지 못한다. 황제들의 권위와 존엄, 힘은 공화정에서 비롯한다. 황제들의 직책, 군단제의 편성, 12표법, 제국의 싱크탱크 원로원과 총독제 등. 로마 제국은 공화정에서의 이행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다. 공화정이라는 전 단계가 없이 제정으로 이행한 타 국가들의 사례를 보자. 중세의 국가들은 모두 봉건제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이는 그들이 국가를 건설적 방향으로 이끄는 집단간 경쟁의 단계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봉건 영주들이 이끄는 작은 연맹체로 구성된 국가는, 국가를 이끄는 단일 목표를 부여받지도, 부여할 명분도 가지지 못하였다. 이들은 역사에서 볼 수 있듯 외부의 막강한 침입이나 위험한 이웃의 등장, 내부의 정치 세력 제거 등의 목적이 없을 경우 하나로 규합되지 않았다. 나의 짧은 사견으로는 강력한 원수정이 뒷받침 되기 위해선, 공동의 목표 추구가 가능한 공화정의 형태가 우선하여야 가능하다고 본다.
'초기 로마'는 크게 왕정과 포에니 전쟁 이전의 공화정으로 나뉜다. 여기서 왕정은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B.C. 753년부터 타르퀴니우스가 축출되는 B.C. 509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사비니와의 전쟁, 루크레티아의 자결 등 사건이 있으나, 대부분의 자료를 역사가 리비우스에 의지하고 있다. 리비우스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사람으로, 구전되는 이야기와 노래 등을 엮어 로마사 최초의 역사서를 편찬하였으나, 자료의 신빙성과 불확실성 등으로 인하여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저자의 로마사는 초기 공화정에서부터 본격적 시작을 한다.
로마 공화정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직책과 권위의 균형이 매우 달라진다. 이는 테세우스의 배를 바라보는 것과 같이 초기 공화정과 말기 공화정은 같은 정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정의 핵심 요소들은 불변하였기 때문에, 공화정의 권력 분립과 공화정의 변혁 과정을 순서대로 정리하고자 한다.
1. 콘술(왕정적 요소) - 켄투리아회에서 선출되는 콘술직은 임기 1년의 2인 체제로 유지되었다. 이들은 전시의 총사령관과 평화시의 최고 수반 명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로는 서로에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권한은 구체적으로 원로원 소집, 켄투리아회 및 트리부스 인민회 소집, 센서스(인구조사)권, 입법, 재판, 식민시 건설, 공유지 관할, 건축/토목, 외국 사절 접견, 종교의식 주최권 등을 포함한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종교의식을 정치적 직책인 콘술이 주재하는 점이다. 콘술은 전시에 1인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어 군권과 비상대권을 부여받았고, 임기 만료 이후에는 프로콘술로써 외부 속주로 발령받아 통치를 행하였다.
2. 원로원(귀족정적, 과두정적 요소) - 300인의 원로로 구성된 원로원은 초기에 귀족들에게만 개방된 조직이었으나, 포풀라레스(평민)의 정치참여가 확대됨에 따라 호민관, 콰이스트로(재무관)에게도 확대된다. 이들은 국가의 결정권 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독재관 임명, 칸슐러 트리뷴직 정원 수 결정, 군대 징집 규모와 배치 결정, 국가 기금 통제, 해외 식민시 특허장 제정, 사절단 구성 등이 있었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원로원이 국가 기금을 직접 통제하였다는 점인데, 평민 출신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었으나 주는 귀족으로 이루어진 원로원이 평민들의 권익 향상을 요하는 법과 정책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잦은 폐단을 낳아 공화정의 몰락을 자초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들은 콘술에게의 자문과 국가 기금 통제권을 가져 콘술에 밀리지 않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3. 민회(민주정적 요소) - 콘술과 원로원은 시간이 갈 수록 평민에게도 문호가 개방되나, 그래도 한계를 가지고 있던 정치참여에 불만을 갖고 민회의 형태로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다. 민회의 주 기능은 투표였으며, 1인 1표제와 단위투표제를 각 민회마다 다르게 채택하였다. 민회의 부 기능은 콘티오라는 예비공청회였는데, 이는 선거 유세와 같이 설득과 그로 인한 민심 변화가 중요한 입법과 재판의 경우에 자주 행해졌다.
3-1. 쿠리아회 - 쿠리아는 티티에스, 람네스, 루케레스 3부족의 각 10개 쿠리아로 출발하였다. 쿠리아회는 형식적으로 임페리움을 부여하는 법의 통과와 신분의 변동 등, 주로 형식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3-2. 트리부스 인민회 - 귀족과 평민을 포함한 전 로마인민이 지역구별로 참가하여 투표하는 기구로, 총 35개의 트리부스로 나뉘어진다. 이후의 정복 영토는 각 트리부스에 귀속되었으며, 콰이스트로(재무관), 아이딜리스(소 정무관 - 로마의 경기, 치안, 위생, 건물, 시장 담당 소 정무관)의 선출과 벌금형과 같은 재판을 담당하였다.
3-3. 트리부스 평민회 - 귀족과 평민들의 정치적 대결 구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민회이다. 원래 민회는 트리부스 평민회를 제외한 3개로 구성되었으나, 평민층이 귀족의 관직 독점과 자의적 재판에 반대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을 주장하여 기원전 494년 호민관직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호민관들의 노력으로 그간 귀족도 참여 가능했던 타 민회와 달리, 평민만 참여 가능한 트리부스 평민회가 설립되었다. 호민관의 주재 하에 호민관, 재무관, 평민 출신의 아이딜리스(소 정무관), 식민시 건설위원, 농지분배위원의 선출과 입법, 재판을 투표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 민회는 단순히 결의로써 법적 구속력은 지니지 않았으며, 이 약점은 이후 원로원들이 주로 활용하게 된다.
3-4. 켄투리아회 - 켄투리아는 로마 군대의 핵심 단위로, 100인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켄투리아는 로마 병종 구성에 따라 에퀴테스(기병), 페디테스(보병), 비무장병으로 이루어졌으며, 에퀴테스는 귀족, 페디테스는 평민, 비무장병은 로마 외 속주민이 구성하였다. 로마는 재산에 비례하여 국가와 재산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강해진다고 보았기에 재산에 따라 정치 참여(전쟁세, 정치적 권리 행사)를 제한하였는데, 그것은 켄투리아의 수를 제한하는 형태로 발생하였다. 재산이 적은 사람들의 입대를 제한하여 재산이 적은 켄투리아 자체를 적게 유지하는 것이다. 켄투리아회는 콘술과 켄소르(센서스 조사), 프라이토르(속주 총독)을 선출하는 주 기능을 가졌으며, 이 외에도 주요 법률 제정, 주요 재판, 국가정책 결정, 센서스 조사 등을 시행하여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힘은 콘술, 원로원, 민회의 세 구성요소가 유익한 방향으로 경쟁하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나, 거부권의 남용, 전근대적 구분으로 인한 권한의 중복의 문제도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은 초기 공화정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정치적 대립과 행정적 필요가 증대하는 후기 공화정에서는 집중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공화정의 문제점이 이후 로마가 원수정으로 이행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자연스럽게 유추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로마의 정체가 어떻게 콘술, 원로원, 민회의 구성요소로 나뉘게 되었고 끊임없이 변화하였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로마가 귀족과 평민의 두 집단으로 나뉘었고, 귀족의 기득권 보호와 평민의 정치 참여 확대라는 두 목표가 지속적으로 부딪혔기 때문이다.
로마의 신분투쟁은 다음과 같다.
1. B.C. 494, 호민관직 창설 - 군대와 행정의 최고 통치권을 가진 콘술의 자의적 권리 행사는, 콘술직의 귀족 독점과 맞물려 평민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평민들은 평민을 보호하는 호민관의 창설과 함께 호민관의 신성불가침성을 주장하였는데, 귀족층은 평민의 의사를 대변할 대표자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다. 호민관은 서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이는 후에 귀족이 일부의 호민관을 포섭하는 장치로 이용되었다.
2. B.C. 471, 트리부스 평민회 설치 - 호민관직이 창설되었으나, 기존의 콘술과 원로원, 민회는 모두 귀족의 독점(콘술, 원로원)이나 귀족과 평민의 동시 참여(민회)였기 때문에 평민만의 의견 관철에는 부족하였다. 따라서 평민들은 평민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를 인정받게 되었는데, 법적 효력이 없다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3. B.C. 451-449, 12표법의 제정 - 귀족들의 자의적인 통치를 막고자 평민들은 성문법 제정을 주장하였고, 이로써 12표법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기존의 역사가들은 제정 배경만을 보고 평민측의 승리라고 주장하나, 12표법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귀족 친화적인 법의 성격이 강하다. 오히려 귀족의 권력수호책으로써 12표법이 제정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4. B.C. 445, 평민 귀족 통혼 가능 - 호민관 카눌레이우스는 귀족이 피정복 로마 인민과는 결혼이 가능하면서, 왜 귀족이 기존 로마 평민과는 결혼이 불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하였고, 논리적 우월함에 따라 이는 곧 추인되었다.
5. B.C. 444-367, 칸슐러 트리뷴직 창설 - 2인으로 운영되던 콘술직은 아이퀴, 볼스키, 베이이인들과의 동시다발적 전쟁에 대응이 힘들었다. 이는 정기적으로 실시되던 센서스가 이 시기에는 진행되지 않았음으로도 알 수 있는데, 이로써 권한을 좀 더 많은 직책이 나누어야 한다는 행정적 필요가 발생하였다. 평민층은 이 때 콘술을 평민들도 참여 가능하도록 수정하기를 주장하였으나, 귀족의 최후의 보루로 인식되었던 콘술을 평민층에게 확대하기에는 귀족층의 거부감이 강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행정적 필요와 정치적 대결의 합의점을 찾기 위하여, 전시에는 콘술의 권한을 6~8인이 나뉘어 가지는 칸슐러 트리뷴직을 창설하게 되었고, 칸슐러 트리뷴의 절반은 평민이 차지하였다. 귀족층은 권력의 방어를 위해 센서스를 전담하는 켄소르직을 창설하였고 독점하였다.
6. B.C. 367,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제정 - 칸슐러 트리뷴직이 폐지되고 다시 2인의 콘술직이 부활하게 된다. 이 때 콘술 2명 중 1명은 평민이 반드시 차지하게 되었고, 귀족은 대신 프라이토르(재판관), 쿠룰리스 아이딜리스(로마시 행정관)을 창설하였다. 그렇다면 왜 5번에서 한계점을 드러낸 콘술직이 다시 부활하고 다수의 칸슐러 트리뷴직이 폐지되었는지를 고찰하여야 한다. 이는 정치 투쟁과 행정개혁의 두 설명이 있으나, 행정개혁의 필요가 우선하고 이후 정치 투쟁이 뒤따랐다는 설명이 좀 더 설득력있다. 칸슐러 트리뷴직은 최대 8, 10인으로 구성된 집단지도체제인데, 이들이 동시에 중복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행정적 비효율을 야기하였다. 다수의 칸슐러 트리뷴이 매 입법, 재판, 행정적 조치마다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슐러 트리뷴 직을 여러 분리된 직책으로 나누는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이 때 평민이 어떠한 직책까지를 차지하여야 하는지 문제가 추가적으로 발생한다. 왜냐하면 칸슐러 트리뷴직의 절반은 무조건 평민이 차지하였는데, 칸슐러 트리뷴직이 폐지되고 새로운 직책이 창설될 경우 이 직책과 권한은 이전대로 귀족에게 돌아가야 하는지, 변화한 상황에 맞추어 평민이 가져가야 하는지, 가져가야 한다면 얼마나 가져가야 하는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것이다. 이 때 평민들은 새로운 직책의 확보(켄소르, 쿠룰리스 아이딜리스 차지)보다, 최고 정무관(콘술)의 확보를 더 열망하였기 때문에, 콘술의 1인 확보라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7. B.C. 287, 호르텐시우스법 제정 - 트리부스 평민회에서 통과되는 법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제 귀족 누구라도 평민들이 제정한 법을 위반할 경우 처벌받게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귀족과 평민의 실질적인 차이는 사라졌으며, 원로원과 호민관의 관계도 보다 더 가깝게 유지되었다. 따라서 주요 입법 기관도 기존의 켄투리아 회에서 더 강력한 트리부스 인민회로 바뀌게 되었다. 켄투리아 회의 주 기능이 콘술의 임명이었고, 트리부스 인민회의 지도자는 호민관이었음을 본다면, 입법의 핵심이 콘술에서 호민관으로 넘어간 것이다.
호르텐시우스법 제정 이후 귀족과 평민의 차이가 사라지게 되었고, 로마 시민과 시민이 아닌 사람의 차이만이 남게 되었다. 로마가 확장하고 부유해짐에 따라 로마 시민권이 갖는 의미도 매우 커지게 되었고, 이는 비시민들로 로마 시민권에 대해 열망하는 이유를 가져다주었다. 로마 시민과 비시민의 구도는 이전의 귀족-평민 구도를 따라갈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로마 시민들은 이전의 사례를 본받아 시민권의 부여를 공동체의 목표와 부합하도록 조성하였다. 그리고 비시민들은 자신의 영달과 씨족의 부흥을 위해 시민권 획득을 위해 몸을 바칠 수 있는 조직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