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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15. 2020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인류학의 대가

 이 책은 레비 스트로스가 일본에서 진행한 강연들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슬픈 열대'와 같이 인류학적 고찰을 깊게 풀어내어 인류의 보편성에 대한 탐구를 이끌어내지 않는다. 이 책은 저자가 생각하는 인류학의 정의와 존재 이유, 인류학을 대하는 자세를 가볍게 전달해주는 도입서이다.


 인류학은 무엇인가? '인간 현상'에 관한 연구이다. 저자가 인류학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고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인류학은 오래전부터 존재하였다.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원정에 동행하여 페르시아와 인도의 생활상을 기록한 기록관, 아랍의 대여행가 이븐 바투타, 인도에 관한 책을 저술한 통일 신라의 설총 등, 인류학적 관심은 항상 존재하였었다. 사람들의 실제 생활상에 초점을 맞췄기에 역사, 고고학, 과학에 비하여 학문의 주류에 속한 시기는 늦었지만, 빠르게 중요성을 가지게 된 학문이기도 하다. 이는 인류 문명이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접촉하게 된 이후, 문명과 문화끼리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파악하려 할 때 그 수단과 자료로 인류학만한 분야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왜 세계의 대다수 주민들이 사촌을 두 범주로 구분하고, 왜 남녀가 수행하는 일이 구분되었는가? 와 같은 질문부터, 서양식 경제 논리의 유래는 어떠하였고, 이는 보편타당한가?와 같은 질문까지, 인류학은 인간 사회의 다양성 속에 있는 어떤 질서 체계에 적용가능하다. 


 쉬운 예시를 들어보자.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일본인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에 대해 "다녀오세요"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일 때, 서양인은 "저 나갑니다(Je sors)"라고 말하고, "잘 가세요"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인류학은 이 사례만 보지 않고, 사실들을 모아놓고 공통점을 찾는다. 일본 문학에서는 여행을 뿌리가 뽑히는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인식하는 반면, 서양 문학에서의 여행은 틀을 깨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경험으로 인식한다. 일본은 '자기 쪽으로 다시 가져오다'는 의미를 중요시하는 반면, 서양은 자기가 스스로 나간다'는 의미를 중요시하는 셈이다. (이해를 위하여 두 사례를 가져왔지만, 저자는 몇 가지 예를 더하여 보편적 의미를 도출한다)


 이와 같이 인류학은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상대를 더욱 가까이 이해하게 도와준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인은 항상 오판하는 점이 있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인데, 인류학에 관한 사례와 그에 대한 의미 (대부분 폴리네시아와 브라질의 연구 사례)를 주위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그들은 현대에 도태된 사례이기에 '흥미로움' 외의 의미는 없다는 말을 한다. 현대 사회는 진보를 거쳐 최적의 선택을 거친 결과물인 반면, 이들은 경쟁에서 패해 사라진 '인류의 실패작'이라는 말이다. 진보의 결과물로 나온 사람이 당신이면 아직 인류도 갈 길이 멀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만 말을 하진 않고 저자가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을 되새기곤 한다.


 인간에게는 아주 옛날부터 뿌리박힌 경향이 있는데, 이는 현재 자기 사회와, 자기와 가장 동떨어져 있는 사회의 관습, 신앙, 가치 등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다. 동떨어진 사회는 관찰자에게 있어 답보 상태로 보인다. 그런데 답보 상태로 보이는 이유는 사회가 실제로 멈춰있기 때문이 아니라, 관찰자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의 체계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이 흔히 생각하는 진보의 개념에 반대되는 주장이다. 현대인은 진보를 직선적으로 이해하지만 역사적으로, 인류학적으로 보았을 때 진보는 원을 그리며 다시 돌아오는 운동이다. 진보란 필수적이지도, 연속적이지도 않으며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도 않고 같은 방향으로만 진행하지도 않는다. 현대인이 보기에 '우수'한 사회와 '열등'한 사회는 동일한 발전선상에서 한쪽이 다른 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행하는 길을 따라가면서 역사의 매 순간마다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선택을 내린다. 그리고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진보의 과정은 연속적이 아니라, 층위를 이루어 동시에 공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는 인류가 만들어낸 진보라는 실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의 실체가 우리의 지식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위대한 종교적, 철학적 체계들(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다양한 학설과 인권선언들)은 당연하게 현대인의 태도에 반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체계들은 인간이 각자 다른 문화에서 이런 본성을 발현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도덕적으로 상처 주는 일은 단죄하고 싶고, 지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차이는 부정하고 싶은 이중의 유혹 속에서, 현대인들은 문화적 다양성을 고려하면서도 충격적이고 불쾌한 것은 없애려는 식으로 행동하였다. 그런데 과연 이해가 가지 않는 충격적인 문화는 정말로 그러한가? 


 1인당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양으로 문명을 측정하면, 서구 문명이 가장 뛰어나다. 그러나 가혹한 지리적 환경에서의 생존 능력이라면, 에스키모와 베두인이 가장 뛰어나다. 인구통계학적 불평등으로 인한 심리적 위기를 줄이는 철학적, 종교적 체계라면, 인도가 가장 뛰어나며 인간 활동에 있어 연대 능력이라면 이슬람이 가장 뛰어나다. 물리세계와 정신세계의 상생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라면 동아시아가 뛰어나며, 정교한 가족, 사회 체계라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이 가장 뛰어나다.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가족 체계의 정교함을 이해하려면 현대 수학의 이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종적, 문화적 포용력과 거시적 정치체계의 기준에선 아프리카가 뛰어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과연 어떠한 점에서 자기 자신이 속한 문명이 진보의 한가운데 있으며, 타 문명은 제외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는 단지 자기 자신의 관점의 편협함과 무지이며, 다양한 문화의 요소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굳게 믿는 오만함일 뿐이다. 인류의 진보는 다양함이 보장되어야 할 때 비로소 발생하며, 새로운 문화와 경험을 마주할 때 개인과 사회가 어떠한 충격을 얻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자명하다.


 주위에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이 있어 가끔 이야기할 때 숨막힐듯한 편협함과 부정을 느낀다. 왜?의 질문과 부정을 동의어로 생각하는 사람들 곁에 있으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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