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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15. 2020

허승일 - 로마사, 공화국의 시민과 민생정치(마지막)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공화정의 격동기, 그리고 사견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술라와 마리우스의 혼란기를 거쳐 카이사르가 등장한다. 술라와 마리우스의 대립으로 인하여 공화정은 점점 속주에서 힘을 기르는 야심 많은 속주 총독들의 무대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정체가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로마 최고의 정예병 군단들을 손에 넣은 카이사르인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부터를 다루지만, 나는 왜 술라와 마리우스, 카이사르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은 로마 사회의 변혁을 보여준 표상에 지나지 않다. 술라와 마리우스, 카이사르의 출현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로마의 신분 투쟁, 이념 대립의 결과물이며, 우리는 분절적인 사건들의 기저 원인을 탐색할 때 로마 공화정의 본질적 갈등 요소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에게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을 분석한 이후 제정의 출현을 바라보는 관점은 불완전한 시각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술라와 마리우스, 카이사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정책, 사상에서 3명을 모두 아우르는 공통점은 없다. 그들의 공통점은 오직 속주에서 힘을 키운 총독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속주를 정벌하거나 지배하고, 중앙 권력(원로원)의 통제가 느슨한 제도상의 허점과 지리상의 한계를 발판으로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한 사람들이다. 이는 로마의 직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보통 1년간의 임기가 종료된 콘술들은 대부분 프로콘술로써 이탈리아 외 속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원로원은 점차 증가하는 속주들을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통치할 시스템과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고, 비효율적인 밥그릇 싸움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노력도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지중해의 안전성도 점차 보장받고 있으니 원로원 의원들의 관심이 해외 무역과 라티푼디움 경영에 쏠렸기 때문이다. 개인과 여러 작은 당파의 이익에 집중하여 국가 정책을 바라보게 되자 속주의 실질적인 통치에는 관심이 줄어들었고, 속주 총독들은 재판과 군사, 행정에 이르는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속주가 총독의 사유재산화 되었고, 군단들은 봉급을 지불하는 총독에 충성을 맹세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술라와 마리우스의 혼란기, 1차 삼두정치를 겪는 동안 원로원은 능동적인 조치를 취할 힘과 의지를 모두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파르살루스에서 승리하여 삼두정치를 종식시킨 카이사르가 로마에 입성하게 되자, 각자 개인의 이익에 골몰해 있던 원로원 의원들도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옵티마테스의 권한이 사라질 수 있음을, SPQR의 의미가 부정될 수 있음을 비로소 인지하였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로마의 정통성 때문에 카이사르는 로마에 머무르며 권력을 절대화하여야 했는데, 반대로 카이사르가 로마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공화파들은 카이사르를 죽일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B.C.44 3월 15일 카이사르는 암살된다. 그리고 그가 암살된 이후 로마 공화파와 카이사르의 부관 안토니우스는 혼란에 빠진 로마 정국을 수습하려 나선다.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민회를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양 측은 각자 연설에 나서는데, 셰익스피어가 정리한 연설에서 옵티마테스와 포풀라테스의 이념 차이를 알 수 있다. 브루투스의 연설은 "Had you rather Caesar were living and die all slaves, than that Caesar were dead, to live all free man?" 으로,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To every Roman citizen he gives, To every several man, 75 drachmas. Moreover, he hath left you all his walks, (중략)"으로 대표된다. 옵티마테스는 카이사르가 공화정의 자유를 침해하였음을, 포풀라테스는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들에게 재산을 가져다주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옵티마테스의 '공화정'이라는 개념은 로마 원로원이 대표하고, 그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국가이다. 따라서 로마 시민의 입장에선, 자신이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로마 공화정의 안위보다는 직접적인 부의 축적에 더 이끌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의 배경에서 알 수 있듯 이 당시 로마 평민층이 겪고 있던 경제적 불평등과 실업 문제를 생각하면, 옵티마테스의 공화정 체제는 문제 해결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도 이를 수 있다. 


 로마 공화파가 지지를 잃은 이후, 이때까지의 흐름을 본다면 실권을 잡은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장악했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는 풋내기 옥타비아누스를 역사의 승리자로 기록한다. 여기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역량이다. 옥타비아누스는 '표면적으로' 로마 공화정의 수호자를 자처하였다. 그는 로마의 인재 풀이자 권력 기반이기도 한 원로원을 무시할 경우, 지지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독재자(카이사르의 사례)는 언제든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원로원에 협조하고 안토니우스에 대항하는 편에 섰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종속적이지 않았으며, 원로원의 약점을 이용하여 주도권을 유지하였다. 그렇다면 원로원의 약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군대 유지 비용이었다. 원로원은 독자적인 군대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군대는 카이사르가 죽고 남긴 마케도니아 군단이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도 이 군대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선수를 쳐 5,000 드라크마의 지급을 약속하고 마케도니아 군단을 포섭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때 현명하게도 지급 주체를 원로원으로 설정하고, 군대의 지휘권을 넘긴다. 속주에 지원을 요청할 능력도 없고, 세금을 적게 내는 평민들에게 막대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못마땅한 원로원이 이 비용을 지불할리는 만무했으며, 마케도니아 군단은 지휘권을 스스로 옥타비아누스에 바친다. 공화정의 유일한 수호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 강력한 지지와 정통성, 군대의 지지를 모두 획득하였으며, 이 형태는 곧 로마 원수정의 형태, 명목상 '황제'가 아니라 명목상 '제 1 시민'의 형태로 이어진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주제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이행하게 된 과정과 원인이다. 고맙게도 저자는 이에 대하여 완벽한 해설을 내리지 않는다. 학문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겸허한 자세를 가졌기 때문일 수 있으나, 어쩌면 독자가 스스로 판단을 내려보도록 기회를 던져주었다고도 생각한다. 왜냐하면 로마 공화정의 정치 구조와 변혁, 법제와 윤리 등 다각적으로 고찰하지만, 이 자료들은 독자의 판단이 개입하지 않을 경우 일차적 자료에 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가 제공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한 로마 공화정의 교체 원인을 생각하려 하였다.


 책을 모두 읽고 들었던 생각은, 로마의 옵티마테스(귀족)층의 '기하학적 평등'의 원리가 로마의 성장 과정에 발맞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이었다. 먼저 설명해야 할 두 가지 개념이 있다. 먼저 '기하학적 평등'이란, "가장 부유한 자들은 가장 무거운 부담을, 그렇지만 또한 가장 큰 영예와 무거운 책임을"이라는 디오니시오스의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로마의 성장 과정은, 포에니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이탈리아 외의 속주를 획득하기 시작한 시기를 일컫는다. 


 위 책은 로마 공화정의 제도적, 정치적 변혁을 줄곧 다루기에, 이러한 관점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그라쿠스의 농지법 개혁 이후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라쿠스의 농지법 개혁이 일어난 원인을 보기 위해선 포에니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을 보아야만 한다. 해외 원정군의 유지 및 전역 문제로 인하여 로마의 불평등이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카르타고와 헬라스는 고대 지중해 세력권 중 이집트를 제외하고 가장 농업 생산량이 높고 보물을 많이 가지고 있던 속주이다. 따라서 이러한 속주의 정복으로 인하여 막대한 부가 쏟아져 들어오고, 지중해의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써 무역의 이익이 증가하였으나 이는 로마 시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더 많은 부를 썼던 옵티마테스가 전쟁 이후의 이익과 이익을 취할 권리를 모두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콘술과 프로콘술은 모두 귀족이었으며 이들은 라티푼디움의 확장과 해외 무역의 독점을 유지하려 시도하였다. 평민층은 점점 줄어드는 자영농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부의 불평등이 심해졌지만 사회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고, 그것이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았던 옵티마테스의 이념은 사회를 장악할 수 없었다. 영토의 확대로 로마 시민권자와 군대는 점점 증가하였고 불만은 가중되었다. 물론 로마 평민층이 투쟁에 나서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고,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또한 불완전한 움직임이었는데,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에서 보면 알 수 있듯 개혁은 옵티마테스의 이익과 시스템을 최대한 보전하는 한에서 움직였다. 따라서 로마에 머무르며 이익의 축적에 몰두한 옵티마테스보다, 속주에서 동고동락한 속주 총독과 장군들이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음은 자명하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 체제라고 불렸던 로마의 정체는 이렇게 무너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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