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쿠스의 농지개혁과 의의
지금까지 로마 공화정이 말기에 접어들기 전 구축하였던 정치 주체들과 그들의 투쟁 과정, 법제, 세금정책, 도덕론을 살펴보았다. 이 모든 다양한 사료들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변화에 빠짐없이 개입하게 된다. 그라쿠스 형제부터 시작된 로마 공화정 말기를 지켜보며, 과연 로마 공화정은 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각자 고민해보자. E.H. 카 선생이 말했던 것처럼, 역사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와 대화하는 것이 아닌가.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은 로마사를 읽어본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의 큰 전환점으로 다가오나, 농지법과 곡물법의 내용은 그 파장에 비하여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내용과 농지개혁의 결말을 같이 들여다보면, 로마의 신분 투쟁이 얼마나 격화되고 있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다. B.C.133에 제정된 형 그라쿠스의 농지법은 전문이 내려오지 않으며, 따라서 B.C.111에 제정된 농지법의 전문을 토대로 짐작해보아야 한다.
1. 로마 시민은 누구든지 500 유게라 이상의 공유지를 점유할 수 없다. (중략) 그 이상은 국가가 몰수한다.
2. 수용된 공유지는 로마 시민에게 추첨으로 1인당 30유게라까지 농경지로 분배한다. 단 그 토지는 매년 소정의 지대를 내야 하며, 영구적으로 매각은 금지된다.
3. 본법을 집행하기 위해 농지분배 3인위원을 뽑는다. 그라쿠스 형제와 형의 장인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선출된다.
4. 소요경비는 '아탈루스의 돈에 관한 법'을 제정, 아탈루스 3세의 페르가뭄의 유산 상속분 중 황실 재산으로 충당한다.
여기서 공유지는 로마 시민의 사유지가 아니라, 로마 정부가 소유한 땅이다. 이것을 왜 이전까지는 로마 시민이 점유하고 있었는가? 본래 로마 평민들은 국가로부터 공유지를 받아 경작을 하는 자영농의 형태였는데, 해외 무역 등으로 부를 축적한 옵티마테스들이 돈이 부족한 평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였고, 상환하지 못할 경우 공유지 경작권을 몰수하여 그들을 소작농의 형태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를 라티푼디움(대농장)이라고 하는데, 로마의 경제는 초기 공화정부터 제정 로마까지 자영농층을 지켜내고 라티푼디움을 견제하는 역사의 연속이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농지법을 제정하였는가? 고대 사가들의 의견은 아피아누스의 '전사의 수적 증가'와 플루타르코스의 '건전한 농민층의 부활'로 나뉘고, 현대 사가들의 의견은 콘찰로프스키의 '사회적 빈곤의 구제책'과 라스트의 '실업자의 구제'로 나뉜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보렌의 '도시의 곡물수급 문제의 일시적 해결'을 일부 타당하다고 평가한다. 로마가 살인적인 곡물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는 점에선 타당하나, 그라쿠스 형제는 농지 분배를 통해서 일시적 해결을 노린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라쿠스 형제가 분배한 토지는 로마 인민의 공유지이지만, 주로 부유층이 차지하고 있던 선점지였다. 부유층들은 선점지를 대부분 수익성이 높은 가축사육장이나 과수재배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라쿠스는 이 땅을 모두 농경지로 바꾸어 가격을 장기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선점지였을까? 가축사육장이나 과수재배지로 사용되던 땅은 선점지 외에도 국가가 임대해주는 공유지 등 로마 인근에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쿠스 형제가 로마 외곽에 있는 선점지들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무산 시민들에게 분배해 줄 합법적 공유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공유지는 직책에 따라 다르게 임대되었는데, 콰이스토르와 켄소르에 의해 임대된 농지는 포에니 전쟁때 징수한 트리부툼을 환급해주지 못하여 토지로 지급한 땅이었다. 이 땅들은 공유지이지만 사적 소유권의 형태를 띄고 있었고, 상환의 선택 주체는 로마가 아니라 권리 소유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라쿠스 형제가 몰수할 수 없었다. 또한 그라쿠스 형제들은 옵티마테스의 불만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라티푼디움을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으므로, 결국 로마 인근에는 남은 농지가 없었다. 이러한 조건들을 거쳐 로마 시민권자에게 농지를 분배하였는데, 여기서 추가적으로 소요 경비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라쿠스 농지법의 수혜자는 무산 계층이었는데, 이들에게 지급할 농기구와 씨앗, 황소 등 영농자금도 지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운이 좋게도 페르가뭄 왕국의 아탈루스 3세가 자신의 유산을 로마에 남겼기 때문에 호민관의 권한으로 이를 운용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위의 농지법이 제정되었고, 빈곤한 수만명의 로마 시민이 농촌에 정착하여 곡물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는 또다시 곡물 위기를 겪는데, B.C.125년 속주 아프리카에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속주로부터의 농작물 공급이 끊기게 된 것이다. B.C.123년 취임한 동생 그라쿠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계 역사에 기념비적인 정책을 실시한다. 곡물법이 바로 그것이다.
1. 로마 시민은 귀족 등 계층에 상관없이 법정가로 곡물을 구입할 수 있었다.
2. 곡물 1 모디우스 당 6.333 아세스의 값을 지불해야 했다.
3. 곡물은 로마에서 1달에 1번 시민들에게 판매되었다.
4. 국가의 방출 소맥을 사기 위해서 시민들은 매달 개인적으로 배급 장소에 직접 나가야 했다.
농지법에서 주의할 점은, 로마 시에 거주하는 자가 아니라 시민권 소유자가 대상이었다는 점, 그리고 빈민 대상 조항이 없다는 이유에서 복지 정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편 그라쿠스는 농지법을 보충하기 위한 창고법, 도로법 등 보충법을 제정하고, 국가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속주 아시아 관세법을 제정하였다.
농지법과 곡물법을 통하여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에 야기된 곡물 인플레이션과 공급난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국가 재정을 관할하였던 원로원과 옵티마테스를 거치지 않고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 부가적으로 로마 시민의 재취업과 새로운 조세 수입원까지 확보하였다는 점, 기본 소득으로 진화할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잃고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옵티마테스의 사주로 농지법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