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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12. 2020

허승일 - 로마사, 공화국의 시민과 민생정치(2)

12표법과 로마의 세금제도, 그리고 도덕론

 (1)에서 12표법에 관련한 내용을 짧게 지나갔었다. 평민층의 정치적 승리라고 알려졌던 12표법의 제정이, 사실은 귀족층의 승리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주장의 논거를 가리기 위하여, 12표법의 내용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12표법은 전문이 전수되지 않으나, 1/3정도는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민사소송절차, 채무, 부모 자식 관계, 유산 상속, 재산, 부동산, 범죄, 국법의 원칙, 장례상의 권리, 혼인, 벌칙이 그것이다. 여기서 모든 내용을 다루기는 힘든만큼, 기존의 사가들이 보았던 관점과 현재 사가들이 보는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 특정 법 조항 위주로 보도록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2표법이 귀족층의 승리라고 주장하는 입장은 크게 두 조항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넥숨(채무노예 제도)와 호민관의 무력화이다. 넥숨은 '자유인인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자기 부채를 자신의 노동으로 갚겠다고 채권자의 인신 구속 하에 들어가는 행위'를 말한다. 계약 노동자로서 일종의 채무 노예가 되는 셈인데, 이 시기 로마의 경제적 층위는 정치적 층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채무자는 대부분 포풀라테스(평민)층이었고, 채권자는 대부분 옵티마테스(귀족)층이라는 뜻이다. 사실 넥숨이라는 제도는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제도였고 채무자가 넥숨을 불이행할 시 처벌도 이루어졌는데, 12표법을 근간으로 성문화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국가적 범위로 넥숨이 이루어지고, 처벌도 또한 국가적 범위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만약 채무자가 넥숨도 이행하지 못하는 채무 불이행자일 경우, 12표법은 채무 불이행자의 재산을 분할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채무 불이행자가 어떠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겠지만, 그 당시 로마인들은 재산에 사람의 몸을 포함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시신마저 분할할 수 있다는 극형의 조항이었다. 


 호민관의 무력화는 12표법의 제정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이다. 2인의 콘술은 '콘술의 권한을 지닌 법률제정 10인'을 선정하여 12표법의 제정 권한을 수여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이 10인에 선정된 인물들인데, 평민들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호민관이 배제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평민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자신들이 요구한 법의 제정 위원에 넣지 않은 것일까? 12표법의 제정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10인 명단에 원한다면 호민관을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사가들의 대답은 4년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B.C. 456년에 호민관 이킬리우스가 로마 아벤티눔 언덕에 있는 공유지를 평민들에게 분배한다는 법안을 통과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 B.C. 452년 신전의 건립 문제로 인하여 공유지를 다시 몰수하자는 논란이 발생하였다. 이 때 평민들은 이킬리우스 법을 폐기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법률제정 10인에 호민관을 넣지 못하게 된 것이다. 


 평민들의 승리를 주장하는 사가들의 근거는 금혼법 폐지에 있다. 금혼법은 귀족과 평민들이 결혼하지 못하는 법 조항인데, 문제는 로마가 피정복 로마 인민은 귀족층과 결혼할 수 있게 허가해주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로마 평민들은 자신들은 귀족과 결혼하지 못하면서 피정복 로마 인민은 결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평민들의 불만이 12표법에서 해소되었다는 점에서 사가들은 평민층의 승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귀족층은 오히려 이 법안을 통과시키고 평민들의 불안을 누그러뜨린 뒤, 귀족끼리의 결혼 서클을 조직하여 세습귀족화를 무리 없이 추진하였다. 평민층의 의도에 반한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오히려 결과가 더 악화되었다는 점에서 금혼법 제정은 평민층의 승리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또한 넥숨과 호민관의 무력화를 고려한다면, 12표법 제정은 귀족층의 승리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로마의 법 제정을 통하여 공화정의 신분 투쟁을 보았다면, 이번엔 트리부툼이라는 재산세를 통하여 로마의 옵티마테스(귀족)층의 '기하학적 평등'이라는 관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트리부툼은 비정기적 재산세로, 로마가 전시와 같은 추가 예산이 필요할 시에 로마 시민들로부터 일정량의 세금을 걷는 제도이다. 트리부툼이 시행되기 이전 로마는 '폴리스형' 세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는 국가 구성원이 선제적으로 국가 운영비를 마련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국가가 시민에게서 재산세를 직접 징수하지 않았으며, 로마는 항구세, 관세, 통행세와 같은 간접세를 통하여 비용을 충당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시민들에 직접적인 부담을 지우지 않았기에 매우 효과적인 제도였다. 그러나 상황은 로마가 팽창하면서 점차 달라졌는데, 그 시초는 B.C.406부터 B.C.398까지 일어난 베이이 전쟁이었다. 본래 로마는 상비군을 운영하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면 훈련된 시민들을 무장시켜 투입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9년에 걸쳐 베이이를 포위하자 생계에 문제가 생긴 군인들에게 급여를 제공할 필요성이 생겼고, 이는 간접세로는 충당하지 못하는 규모였다. 이부터 센서스에 기반한 직접세 트리부툼이 부과되기 시작하였다. 전시에만 국고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정기적 세금은 아니었으며, '무장을 할 수 있는' 시민들이 '동원 된' 시민들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는 형태였다. 


 여기서 트리부툼은 로마 옵티마테스층의 '기하학적 평등'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었다. 재산이 많은 이들은 많이 납부하였고, 적은 이들은 적게 납부하였다. 트리부툼은 보통 재산의 일정 비율만큼 납부하도록 되었는데, 많이 가진 자일수록 많이 부담하고, 많이 가져가야 한다는 고대 정치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트리부툼 이전에도 켄투리아 제도를 통해서 기하학적 평등의 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재산이 많은 이들이 군사적 무장을 더 많이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군사 구성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반면 재산이 적은 이들은 생업에 종사하기도 바빴고, 더욱이 무장을 구입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마군 중 적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전쟁의 기여도가 달랐기 때문에, 전쟁 이후의 논공행상과 명예의 차지에서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트리부툼을 로마 시민들에게서 징수하는 역할은 누가 하였을까? 로마에는 전문 징수원이 없었고, 로마 시민을 상대로 대규모 조사를 할 수 있는 직책은 켄소르가 거의 유일하였다. 따라서 트리부툼을 징수할 인원을 선정하여야 했는데, 트리부툼은 정기적인 세금이 아니기 때문에 직책을 신설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때 로마는 '트리부니 아이라리이'라는 세금 선납원 제도를 사용하였다. 이는 선납원이 정부에게 할당량만큼 세금을 납부한 이후, 선납원들이 할당받은 시민들을 돌아다니며 세금을 걷어 자신에게 충당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이들은 먼저 대금을 지불하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으며, 평민들로 구성되었다. 


 저자는 12표법과 트리부툼에 이어, 본격적으로 로마를 변화시킨 그라쿠스의 농지법에 대해 알아보기 이전 로마의 도덕론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로마의 공화정의 변화에 대한 주제를 담은 책인데, 왜 정치와 경제 외에 도덕까지 다룰 필요가 있을까? 그 이유는 로마의 도덕론과 정치 체제가 동일한 토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토대란 바로 옵티마테스(귀족)이며, 그 대표자는 키케로이다. 키케로는 철학자로도 유명하지만,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으로 보아야한다. '카틸리나의 음모'를 막아내 로마의 국부가 되었고, 그 후 옵티마테스의 정신적 지주로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정치 논리는 옵티마테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기에, 키케로의 주장과 변론의 내용을 토대로 옵티마테스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키케로는 후기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생의 목적은 인간의 체질에 맞게 사는 것이다'라는 논지를 가지고 있는 후기 스토아 학파는, 헬라스(그리스)의 몰락과 로마 문명에의 흡수에 따라 자연스럽게 로마의 주류가 되었다. '인간의 체질에 맞게 사는 것'은 '행복하게 되는 것'으로, 후기 스토아 학파는 '행복'을 '덕'에 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덕'이 4추덕, '지','의','용','인'에서 비롯되며, 이를 모두 갖추어야 행복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4추덕은 구체적으로 어떠한가?


 지 - 주어진 사물에서 진실되고 순수한 것이 무엇이고, 공감이 가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는 무엇이고, 각 사물의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즉 인과관계를 인식하는 능력

 의 - 인간 사회를 유지케 하고, 또 생활공동체 같은 것을 유지케 하는 것

 용 - 어떤 정신의 불안정이나 운명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신념의 표시

 인 - 이성이 주도하고 욕망이 복종하는 정신의 상태


 이 4추덕이 발현된 덕의 생활을 키케로는 자신의 '의무론'에서 정의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국가에 최우선으로 충성하고, 부모에 대한 효도이다. 따라서 키케로는 국가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생명과 이익을 포기하는 사례들을 찬양하였으며, 대표적인 예시로 카우디움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부하를 구하고, 자신은 적에게 죽음을 맞이한 포스투미우스와 베투리우스의 사례, 카르타고를 멸망시켰지만 사재를 축적하지 않은 소 스키피오의 사례를 들고 있다. 이에 비추어 보았을때, 키케로와 옵티마테스는 국가(로마 공화정 = 원로원)에 충성하고 그 체제 하에서 개개인에 알맞는 위치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의 덕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점차 증가하는 로마 시민권자들과, 포풀라레스로 인하여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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