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에서 벗어난 풍운아의 전략
역사에 길이 남았던 사람들의 커리어는 어땠을까? 그들은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고, 어떻게 대처했을까?
역사적으로 성공했던 사람들과 실패했던 사람들의 커리어를 돌이켜보고, 그 분기마다 어떤 차이점이 존재했었는지 들여다보자. 왜 이 사람은 이러한 선택을 내렸고, 저 사람은 이러한 선택을 내렸으며, 그 선택들이 왜 성공과 실패로 나뉘어졌는지 들여다보면서 우리도 어떠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손자병법의 1-7장에 의하면, "전쟁을 하기 전에 승리할 요소를 많이 갖고 있으면 승리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요, 승리할 요소를 적게 갖고 있으면 승리의 가능성이 낮은 것이다."라고 한다. 이 구절을 들어 역사가들은 카이사르가 다른 위인들과의 차별점을 갖는다고 말한다. 카이사르가 대결했던 상대의 자원은 항상 카이사르가 가진 자원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싸움을 하기도 전에 승리할 요소를 적게 갖고 있으니, 일반적인 사람의 눈에선 카이사르가 신비롭게 보일 법 하다.
그런데 여기서 손자병법 1-7장보다 앞에 나오는 1-6장을 보자. "상황에 따라 즉응하는 것이 전쟁을 아는 사람의 승리이니, 미리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정형화하여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뜻은 무엇인가? 카이사르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 자원은 항상 불리하였으나, 그 자원을 항상 상황에 맞추어 효율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즉 자본과 기존의 사업 영역을 고려하였을 때 불리한 작은 기업이지만 경쟁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낼 줄 알았던 셈이다.
다시 카이사르의 삶으로 돌아가자. 논객으로 활동하며 커리어를 쌓고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뚜렷한 공적이 없었다. 국민들의 대중적인 지지를 얻어야 그 이상의 커리어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로마의 구조상, 공적의 부재는 카이사르에게 한계로 작용하였다. 이때 카이사르는 의외의 선택을 내린다. 지방으로 근무지를 옮긴 것이다. 카이사르가 향했던 지방은 현대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접경 지역인데, 여긴 이미 100여년 전 문명화가 된 곳이라 큰 공적을 쌓을만한 기회는 없었다. 다만 포르투갈 지역에 남아있던 야만족이 있었는데, 작은 공적이지만 이렇게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간듯 하다. 실제로 그는 부임하자마자 공세를 취하여 야만족을 정복하였다. (이때는 로마의 풍부한 자원적 이점이 매우 컸다)
로마의 기존 전쟁들과 비교하였을때 작은 공적이었지만, 스페인 지방을 깔끔히 정리했다는 점과 그 해의 굵직한 사업이 없었던 점에서 카이사르는 로마 지도층(원로원)에게 관심을 얻게 된다. 다만 건설적인 관심은 아니었나 보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개선식을 할 것인지(대중적 인기), 집정관(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출마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보통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데, 카이사르가 이전에 보여준 전적들이 있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것이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대중적 인기를 얻어 자신만의 정파를 만들고 세력을 키울지, 정치적 영향력을 얻어 직접 정치계의 중심으로 들어갈지 선택해야 했다.
무엇을 선택해도 +로 작용할것이지만, 여기서 그는 장기적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자신이 대중적 인기를 얻어도 국정을 주도할 세력을 갖추지는 못할 가능성이 컸다(집정관과 호민관에 오르지 않고 정국을 주도한 선례가 없었다). 대신 집정관에 출마하여 당선된다면 꾸준히 정치의 중심에 머무를 수 있으며 부가적인 기회도 얻을 수 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출마를 선택했다. 다만 출마를 선택한것이고 아직 당선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는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경쟁자들의 견제를 뿌리쳐야 하는 고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로마의 선거전략은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어떤 업적을 가지고 있고, 당신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필하는 것이다. 덤으로 나와 경쟁하는 사람이 어떤 흠을 가지고 있는지까지, 로마의 선거전략은 지금과 똑같았다. 그런데 이 관점에서 보면 카이사르는 딱히 큰 강점은 없었다. 개선식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서 큰 관심을 얻지는 못했고, 공적을 세웠으나 아주 크지는 않았다. 그리고 로마 지도층(원로원)이 각자 후원하는 후보들도 많았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여기서 손자병법 1-6장을 기억하자.
가지고 있는 자원은 불리했다. 경쟁자는 많고 강하다. 카이사르는 여기서 자신을 도와줄 우군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당선된다면 안심할 수 있고, 경쟁자가 당선된다면 피해가 생길 사람은 누구일까? '나만의 자원'을 활용해봤자 이길 수 없으니, '남의 자원'을 활용하자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나온 우군이 바로 폼페이우스이다. 카이사르의 마지막 결전 상대로 역사에 남았지만, 이 당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넘보지도 못할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가적 골칫거리였던 해적을 소탕하여 로마의 물류를 최적화하였다. 이 업적을 통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원로원의 지지도 얻었으나, 그가 거느린 대규모 군사들이 세력을 이루기 시작했다. 지도층(원로원)의 입장에선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에 긴장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의 요구(주로 인센티브 요구였다)를 묵살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 휘하 세력들의 불만이 커져가던 때에, 폼페이우스 앞에 카이사르가 나타났다.
폼페이우스의 입장에선, 정계의 중심에서 자신 세력을 공고히해줄 정책을 실행할 사람이 필요했다. 자신이 직접 출마하는 방법도 있으나, 그랬다면 원로원의 집중포화를 맞아야만 했다. 그리고 41세의 카이사르는 자신을 대중에게 확실히 어필해줄 후원자가 필요했다. 둘의 이해관계가 맞았고, 여기에 자금까지 더해줄 크라수스가 추가되어 3두정치가 시작되었다. (현대의 사례를 들자면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이 힘을 합쳐 정국을 한번에 역전한 1990년의 3당 합당이 있을수 있겠다)
정책 입안의 카이사르, 대중적 지지의 폼페이우스, 막대한 자금력의 크라수스. 셋이 모였을 때 이 연합에 섣불리 반대할 세력은 없었다(대중적 지지의 폼페이우스 덕이 컸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위하고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하여 친 폼페이우스 정책들을 대거 내놓았다. 이에 반대하는 몇 의원들도 있었으나, 전부 폼페이우스의 세력에게 견제와 린치를 당하였다. 그렇게 카이사르의 집정과 임기는 철저히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면서 유지되었다. 카이사르도 집정관직을 성공적으로(3두정치의 힘을 키워주면서) 수행하였고 자기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유명한 장군들은 대다수가 이쯤에서 합류한다)
짧은 집정관 임기가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 당시 로마의 집정관들은 퇴임 후 지방으로 발령받아 활동하였다(대부분 알짜배기 지방으로 내려가 뇌물을 받으며 편안히 여생을 보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이대로 정계에서 물러날 생각도 없었고, 정점으로 올라가고 싶은 열망이 컸다. 어떤 곳으로 옮겨야 더 큰 위치로 갈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한 정보가 그의 눈에 띄었다.
결국 카이사르가 정점에 도달하려면 폼페이우스와 같은 대중적 인기를 얻어야 했고,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해선 군사적 업적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쌓았던 업적보다 훨씬 커야만 했다. 그 때 집정관 카이사르에게 정보가 들어왔다. 헬베티족이 갈리아(지금의 프랑스)로 움직이려 한다는 정보였다.
헬베티족은 누구일까? 지금의 스위스(현재 스위스의 공식 명칭은 헬베티아 연방이다)에 거주하고 있던 민족으로, 강한 공격성과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산골짜기 스위스에서 살고 있었으나, 인구수가 불어나자 드넓은 평야지대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위스 바로 옆에 드넓은 평야가 있고, 아직까지 강력한 경쟁자가 없는 프랑스 지역(아직 로마는 프랑스로 진출하지 않은 상태였다)이 있으니, 그들의 선택은 합리적이었다. 다만 그들이 고려하지 못한 점은, 로마에 군사적 공적을 호시탐탐 노리던 카이사르가 있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입장에 헬베티족을 막아야 함은 너무나 자명했다. 개인적인 공적을 떠나서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 당시 로마의 영토는 스페인-이탈리아-발칸반도(현대의 크로아티아, 그리스 지방)-아프리카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프랑스에 만약 강력한 헬베티족이 들어선다면?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잇는 통로가 점거되고, 이는 국가적 위기로 다가올 수 있었다. 무역과 군사적 이동이 제한(시장에서의 패배)되고, 국가적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인것이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곧장 불러, 자신의 추후 발령지는 갈리아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헬베티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이 자명한데, 이러한 기회를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마다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입장에선 막대한 재산 축적이 가능한 타 지역(대표적으로 아프리카, 발칸반도)을 잃지 않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42세의 카이사르는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장소를 향해 움직이게 되었다. 자신의 세력을 이루는데는 성공했으나 강력하지는 않았으며, 기껏해야 폼페이우스의 끄나풀로 인식되던 때였다. 그런데 그 다음해 그는 자신이 자진해서 갈리아로 간 이유를 입증해낸다. 전세계 역사로 돌아켜보아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천재적인 사람의 천재적인 전략이 등장한 것이다.
역:사적인 경영전략 (1.3) - 카이사르 : '자진해서 사지에 내몰린 영웅' 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