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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선 May 15. 2023

마음 간식 스토아깡

죽은 지식이 아닌, 살아가는 지혜로서의 철학

스토아깡을 시작하는 이유

스토아 학파, 금욕주의, 아파테이아.

에피쿠로스 학파, 쾌락주의, 아타락시아.

요새 중학교 도덕시간에도 이런 지는 모르겠지만, 2000년대에 중학교를 다닌 나는 도덕 시간에 이런 주입으로써 철학에 대해 접했던 것 같다. 사실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헷갈릴 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앞의 저 두 라인만큼은 여전히 뇌리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아파 아파, 아프니까 금욕주의 스토아 학파. 아~ 타락했네 쾌락주의 에피쿠로스. 이런 식으로 나름의 리듬까지 만들어서 외워댔으니 말이다. 아마 이 글을 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고대 헬레니즘 철학이 실제로 말하려고 시도했던 게 뭔지는 몰라도 최소한 어디 가서 스토아는 금욕주의고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지, 암 그렇고 말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아는 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대강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학교에서 '슬기로운 생활', '도덕', '윤리'에 대해 배웠는데 정작 그 속에서 뭘 배웠는데 그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건지를 떠올려보면 의아함이 뒤통수를 세게 후리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뭘 배운 거지?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시대에 스토아 학파라는 철학 사조가 있었는데 금욕주의적 도덕을 내세우면서 아파테이아라는 경지를 주창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그래서 시험지 위의 빈칸 4개에 헬레니즘, 스토아, 금욕주의, 아파테이아를 채워 넣을 수 있게 된다고 해서 그게 우리 인생에 무슨 의미가 되어줄 수 있는 건지 의문이다. 도덕, 윤리,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주입됐던 그 무언가가 진정으로 필요해지는 순간, 특히 우리 대부분이 인생다운 인생을 살게 되는 학교 이후의 삶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돼버리지 않나. 아니 오히려 아는척하다가 쪽팔림 당하기 쉬운 반쪽짜리에도 한참 못 미치는 사이비 지식이 돼버리고 만다.


인생다운 인생. 사람들이 종종 얘기하는 '표준이라 여겨지는 몇 가지 잣대로 남들과 비교해서 최소 평균 수준은 되는 사람답게 사는' 그런 인생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고통이 가득한, 찰나의 행복을 위해 긴 지루함을 견디고 불행이란 언덕을 넘어야 하는, 불안하고 넘어지고 다치기 쉬운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덕, 윤리 시간에 찍먹에도 못 미치게 핥고 지나간 '그게' 진짜 필요한 이유는 이 인생다운 인생에 있다. 당신이 기계 혹은 노예처럼 살지 않을 거라면 당면하게 되는 그 인생말이다.

그래서 이 매거진을 시작해 보려고 토요일 아침부터 이렇게 부족한 글솜씨를 끼적대고 있다. 이 불안하고 고통이 가득한 인생을 조금이라도 더 평화롭게, 덜 몸부림치고 살아내는 방법에 대해서 써보려 한다. 글을 적는 필자에게도, 읽는 독자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말이다. 다른 짐은 나누어지지 못해도, 마음의 짐이라도 잠시나마 나누어 들 수 있기를 소소하게 희망하면서.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

몸의 근육을 키우려면, 첫째 양질의 음식을 먹어 근육을 구성할 양분을 공급하고, 둘째 키우고 싶은 부위의 근육을 적합한 방법으로 운동해줘야 한다. 본격 피지컬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근육은 어떤가?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는 것을, 정확히 근육은 아니고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혹은 알지만 훨씬 잘 보이는 몸을 챙기는 데에 급급한 나머지 마음을 챙기는 것을 소홀히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Haste makes waste다. 강철의 연금술사가 강조하듯 이곳은 등가교환(trade-off)의 세상이기 때문에 빠르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삶은 얻는 게 있지만, 분명히 잃는 것도 있다. 그래서 이 초고속 시대에 맞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마음을 챙기지 못해 상처를 입고 다치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랬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세상을 살아내는 사람치고 이런 문제나 고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살고 있다면, 적어도 한 번쯤은 말이다.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 중 누구도 이번 생을, 이 시간을 두 번째로 살아내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굉장히 운이 좋은 케이스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처음 경험하는 문제에 대해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다. 자전거를 처음 타보는 아이가 갑자기 어딘가에서 굴러온 돌멩이에 걸려 넘어졌다고 해서 그게 아이의 잘못이라고 나무랄 수 없듯, 인생을 처음 타보는 우리가 어딘가에서 넘어졌다고 해서 그게 우리의 잘못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불공평하다. 심한 처사다. 하지만 그 아이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10년째 넘어지고 있다면? 그때 누군가 그 아이를 나무란다고 해서 야박하고 심한 처사라는 얘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고, 그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전거를, 인생을 혼자서도 넘어지지 않고 잘 탈 수 있게 연습하고 노력해야 한다.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마음짱까지는 못돼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즐겁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인생을 타기 위해서.


끝끝내 인생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그래서 스토아 철학을 골랐다. 스토아 철학은 마치 마음의 달리기 같은 철학이다. 대부분의 스포츠에서 기본이 되는 것이 달리기라는 말이 있다. 체력, 순발력, 지구력 등등 대부분의 신체 능력과 연결된 활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정적이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의 스포츠 분야에서 기본 점수를 먹고 들어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달리기로 먼저 토대를 다진 이후에 자신에게 더 맞는, 자신이 원하는 스포츠로 넘어가는 것은 꽤 성공확률이 높은 접근이다. 마음의 운동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세상에는 많은 철학이 있을 수 있다. 자신만의 철학을 확립할 가능성마저 있다. 하지만 어느 가지로 뻗어나가든 뿌리는 탄탄해야 한다. 나는 스토아 철학이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데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개똥철학으로 발전해도 좋다. 
안될 거 뭐 있나?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그게 개똥이든 소똥이든 뭐든.
고명한 철학자들의 철학도 어떤 면에서는 모두 개똥철학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매거진을 만들어서 연재를 해보려고 하니, 철학이라는 말이 꺼려졌다. 그 단어 자체가 풍기는 거창하게 지루하고 따분한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지혜... 도 좀 거창한 감이 있고. 내가 쓰고 싶은 건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단지 또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각자의 인생과 휴전을 넘어 종전, 평화를 이루는 길까지 필요한 때에 보조바퀴가 되어주고 마음의 근육에 약간의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그런 간식 같은, 간편하게 갈겨쓴 약간의 글 말이다. 그러자 스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스토아동산, 스토아칩, 스토아밥 등등이 연상되던 찰나에 새우깡이 떠올랐다. 깡. 깡이 좋을 것 같았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인생을 마주하려면 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토아깡이란 매거진 이름은 그렇게 연성되었다. 새우깡이 뭐 그렇게 대단한 영양 간식이라고 거기에 빗대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쓸 글들은 딱 그 정도일 것이다. 아니 그 정도에라도 미칠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일 것이다. 내가 뭐 철학, 심리학, 뇌과학, 정신의학박사라고 스토아카롱이나 스토아상 같은 걸 만들 수 있겠나? 그런 건 전문점에 가서 드시길!


농심 관계자 여러분, 이거 다 그냥 비유인 거 아시죠?
저는 마카롱이나 크루아상보다 새우깡이 더 좋아요.



스토아깡 맛보기

마지막으로 스토아 철학을 금욕주의, 아파테이아라고만 알고 계실 분들을 위해서 이 사람들이 빚고자 했던 가르침이 어떤 맛인지를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선에서 대강 말해보겠다. 그래서 이게 달콤한 쪽인지 짠 쪽인지 매운 쪽인지 기본이 되는 맛이 뭔지는 알아야 내 입 맛에 맞을지를 가늠할 수 있으니까.


앞서 말했듯이 스토아 철학은 수많은 철학의 종류 중에서 현대식으로 치면 라이프 스타일에 가까운 철학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이들의 목적은 고통과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고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확실한 이 세상에서 잘 사는 방법을 연구하고 훈련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 '잘 사는 것'은 일단 개인적인 안녕이 우선이다. 먼저 자신이 개인적인 평화와 안정을 지켜낼 수 있어야 남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도 건강하게 힘쓸 수 있다. 뭐 기원전 몇 세기에 누가 처음 창시해서 어떤 어떤 대표적인 철학자들이 있고 뭐 이런 건 몰라도 된다. 그런 건 시험지 빈칸 채우는데나 쓸모 있는 피상적인 지식일 뿐이다.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이는데 그 레시피를 최초로 누가 만들었고 또 누가 발전시켰는지는 완전히 무쓸모하다는 것과 일맥이 상통한다. 어떻게 끓이는지 그 방법이 중요한 것이다. 좀 더 평화롭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낼 수 있는 누구나 실천 가능하고 실용적인 방법을 배우는 게 실제로 더 중요하듯이.


인생은 시험지 빈칸 채우기보다는
맛있는 김치찌개를 요리하는 것에 가깝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인생을 위한 누구나 실천 가능하고 실용적인 방법, 이걸 연구하고 훈련하는 철학이라는 게 어찌 보면 스토아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렇지 못한 것들은? 수용한다. 이를테면 내일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악천후로 하루 종일 장대비가 내리게 생겼다. 그 상황에서 불가항력에 불만을 품고 불평을 하기보다는 그 여행지에서 비가 내려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가 개구리 소년(소녀)가 아닌 이상 날씨는 불평해 봐야 결과가 달라지지 않지만 비가 내려도 즐길 수 있는 계획을 마련하는 것은 우리의 여행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크게 다르게 만들 수 있다. 이게 스토아 철학의 핵심이다.



하긴 개구리 소년, 소녀라면 더더욱 울고불고하면 안 되겠구나.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 행동, 그리고 다른 사람이나 어떤 상황 같은 우리 외부에 있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뿐이다. 그 외의 것들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컨트롤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들은 애초에 깔끔하게 포기해 버린다. 아마 이걸 읽고 계실 많은 분들이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걸 컨트롤해보겠다고 지지고 볶고 애쓰다가 결과는 더 나빠졌는데 마음의 상처까지 입은 경험을 적어도 한 번은 해봤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애먼 곳에 힘 빼지 말고 우리가 현실적으로, 직접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많은 시간과 힘, 특히 정신력을 아낄 수 있다. 여기서 정신력을 쓴다는 말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말과 동치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우리의 생각, 행동, 반응은 모두 어디에서 나오는가? 당신이 지금 찾고 있을 적합한 혹은 적당한 표현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집중해야 할 곳은 외부가 아닌 내부, 우리 자신이다.


이 시각이 더 발전하면 모든 고통의 본질적인 원인은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붓다의 가르침이 된다.
스토아 철학은 내가 담마를 잘 수용할 수 있게 해 준 마중물이 돼주었다.

여기까지가 맛보기다. 맛이 어떤가? 허무맹랑한가? 아니면 합리적인가? 내게는 굉장히 합리적으로 들린다. 내가 겪은 대부분의 크고 작은 문제와 고통들이 컨트롤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을 컨트롤하려다 초래된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당신도 고개를 살짝이라도 끄덕였기를 희망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 살짝 맛볼 수 있듯이 스토아 철학의 기본 간은 이성으로 되어있다. 이성이란 단어도 철학이란 단어처럼 꽤나 따분하게 들린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감성을 풍부하게 즐기기 위해서라도 안정적인 이성은 필요하다. 감성을 건강하게, 오래 즐기고 싶다면 말이다. 행복이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더 이상 그 행복한 시간 속을 헤엄칠 수 없을 때, 그리고 다음 밀물이 언제 올지도 모른 채 오래 기다려야 할 때, 그 우울해(海)의 뻘 속에 빠지지 않고 별 일 없이 다음 물때를 차분히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 여기 약간의 스토아깡이 있다. 먹어라. 그리고 직접, 천천히, 조금씩 운동하고 연습하면서 근육을 키워라. 그렇게 마음의 근육이 조금씩 커지면, 당신이 거뜬히 다룰 수 있는 고통의 중량도 조금씩 늘어날 것이다. 혹시 아는가, 당신이 몸짱이 될 자질은 아쉽게도 타고나지 못했어도 마음짱은 가능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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