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 법으로 만든 인간
법으로 만든 인간이 ‘법인’이다. 대표적인 것이 법인격의 회사이다. 그런데 이 법인의 실체는 누구일까? 가끔 이런 보도를 접한다. ‘국가는 원고에게 피해 보상금 얼마를 지급하라.’ 여기서 국가는 누구인가? 예전에 회사의 소송 대리인 자격으로 부당 해고 무효확인 소송에 임한 바 있다. 한때 영업매니저였던 원고가 자신의 해고는 부당하며 이를 철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 해서다. 나는 변호사와 함께 회사를 대리하여 그 사람의 해고는 정당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소송은 대표이사가 회사를 대표해 참석해야 하지만 보통은 관련 부서 직원이 대표이사의 위임장을 받아 소송을 대리한다. 당시 해고된 직원이 나에게 했던 말이 지금도 선명하다. “당신도 근로자잖아.” 그랬다. 나도 분명 근로자인데 마치 회사 행세를 하며 ‘너는 해고되어 마땅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그날 재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도 그 상황이 이상해 ‘대체 회사는 누구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정말이지 회사는 누굴까? 사장일까? 아니다. 그는 대표이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임기를 다하면 물러나는 개인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장들이 취임했다 물러나기를 반복했던가. 그래도 회사는 꿋꿋이 남아있다. 우리는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회사를 본 적이 없다. 그냥 회사 간판이 있는 건물에 들어가 하루 8시간 근로조건을 충족하고 집으로 온다. 그런 면에서 회사는 실체가 없다. 하지만 회사는 개인들에게 막강한 힘을 행사한다.
어제 회사에서 영업하는 누군가를 만났다. 회사가 작년에 약속한 것을 올해 대표이사가 바뀌면서 원점에서 재검토하게 되어 필드 영업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영업을 곧잘 하니 좋은 조건에 오라는 곳은 있는데 회사와의 의리 때문에 난감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되물었다. “회사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회사는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아니고, 사장은 더더욱 아니며 본사 건물이나 간판도 아니다. 그러니 회사는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상상 속 이미지가 아니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나의 사례를 소개했다.
회사 생활 끝 무렵 코로나 상황에서 겪었던 어려움이다. 경쟁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영업여건에서 고군분투했지만 실적 부진으로 보직도 없는 발령을 받았을 때였다. ‘그간 성과도 상당했는데 그건 온데간데 없고 내게 이런 취급을 하다니. 이런 회사는 당장 그만두어야겠다’는 반발심이 생겼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려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치자. 하지만 일은 해야겠기에 다른 회사를 알아봐야겠지. A사, B사, C사도 있지만 마지막으로 지금 다니는 회사도 후보군에 포함시키자. 이제부터는 급여, 처우, 적응 등 다양한 고려 사항을 염두에 두고 객관적으로 비교한 결과 최선의 선택은 어디인지를 고르자.’ 결론은 지금 다니는 회사였다. 이후 나는 경력직 사원으로 이 회사에 입사했다는 마음을 냈고 남은 2년 6개월을 잘 보냈다.
회사는 실체가 없기에 의리를 나눌 대상이 아니다. 내가 요구하는 조건과 회사가 제시하는 조건이 맞을 때 나의 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곳이다. 회사에 대해 의리를 생각한다고? 그건 임기가 정해진 대표이사도 안 하는 행위 같다. 사장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이 상충될 때 선택 할 수 있다면 사장은 과연 회사의 이익을 택할 것인가? 왠지 아닐 것 같다. 내가 아는 사장들은 그랬다. 회사의 장기 비전보다는 자신의 2년 임기에 맞춘 KPI를 달성하고 퇴직시 두둑한 성과급을 챙기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회사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한시적 관계임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왜? 회사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