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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의 12,000 승?

내가 존재할 확률

by 장용범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내 부모님 중 한 분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더라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다. 이는 무척 간단한 가정이다. 그런데 좀 더 위로 올라가 내 조부모나 외조부모 중 어떤 한 분이 다른 분과 결혼을 했더라면 내 아버지나 어머니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증조부, 고조부, 외증조부, 외고조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가? 인류의 기원이 30만 년 정도라고 하니 먼 옛날 어느 원숭이 닮은 영장류 중 부계와 모계의 내 조상이 있었을 것이고 그가 만일 다른 상대를 골라 자손을 퍼뜨렸거나 자손도 없이 죽는 사고를 당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세대를 20~25년 정도라고 가정하면 우리는 지난 30만 년 동안 대략 12,000~15,000 세대를 지나 오늘을 맞이했다. 그렇다면 부계와 모계를 기준으로 보면 2의 12,000승이나 2의 15,000승의 사람들이 나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관여된 사람들이다. 2의 12,000승, 2의 15,000승에 해당하는 숫자가 가늠이 안 되어 챗GPT에 물어보니 너무 큰 숫자라 표현할 수는 없고 자릿수만 3,613자리 ~ 4,516자리라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 부모님이 있어야 내가 있으니 2의 1승으로 2명. 내 조부모님과 외조부모님이 있어야 내 부모님이 있고 내가 있을 수 있으니 2의 2승으로 4명에 해당한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2의 12,000승, 2의 15,000승이라는 의미이다. 1억이라는 숫자의 자릿수는 100,000,000로 9자리이다. 이게 3,613~4,516자리라고 하면 정말 어마무시한 크기이다. 그중의 한쪽이라도 다른 배우자를 선택했거나 자손도 없이 죽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니 이건 그야말로 충격이다.


현대사회는 그나마 안전하다고 하나 수렵사회는 언제 맹수의 공격을 당할지 알 수도 없고 지난 인류의 역사 속에 수많은 전쟁과 자연재해 속에서도 내 모계나 부계의 조상들은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얘기다. 그리보면 오늘날 살아있는 자의 조상들은 비겁한 겁쟁이였거나 용감하다면 아주 운이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 원시시대 커다란 사냥감이 나타났을 때 무리 앞에서 제일 먼저 창을 들고 나섰던 이는 죽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또 전쟁이 났을 때 용감하게 싸웠던 경우에도 생존의 가능성은 낮았을 것이다. 이유야 어떠하든 끝까지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던 이들이 나의 조상이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과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침팬지와 한 조상에서 진화되어 우연한 선택으로 하나는 우리 안에, 또 하나는 우리 밖에서 서로를 보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리보면 오늘 거울 앞에선 나의 존재 자체가 기적인 셈이다. 나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야 할 또 다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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