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교수님들과 식사 자리가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교수님들의 수다 속에서 플렉스(flex)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요즘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플렉스라고 한다며? 나도 옛날에는 플렉스 하면서 살았는데 결혼하고 애들 생긴 뒤로는 못하고 있네. 하하하." 가장 높은 교수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저도 예전에 플렉스 한 적이 있어요. 고3 때 부모님하고 선생님들이 다 의대 가라고 하셨는데 저는 인문학이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다 무시하고 인문대로 갔죠." 결국 의학전문대학원을 거쳐 의사가 된 교수님이 거들었다.
"제 친척 중에도 그런 분이 있었어요. 공장 다니는 분이셨는데, 월급 모아서 춘원 이광수 전집을 사서 계속 읽으시더라고요." 다른 교수님도 한 사례 보탰다.
'저건 플렉스라기보다는 낭만 아니야?' 교수님들의 플렉스 썰을 들으며 문득 든 생각이었다. 내가 아는 플렉스는 부를 과시하기 위한 소비 행위인데, 교수님들이 제시하는 플렉스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편한 길을 포기하고 꿈을 좇는 선택, 가난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는 모습, 플렉스와는 틀림없이 다른 '낭만'이었다.
그때부터는 교수님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낭만과 플렉스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낭만과 플렉스는 분명히 닮은 개념이었다. 평범함과 거리가 멀더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교수님들이 헷갈린 부분도 이 부분이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사실은 동의어가 아닐까?
하지만 '낭만 닥터 김사부'를 '플렉스 닥터 김사부'로 바꿔보았더니, 둘의 차이점은 명확해졌다. 낭만 닥터 김사부는 돈에 연연하지 않고 환자를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의사라면, 플렉스 닥터 김사부는 열심히 일해 번 돈을 펑펑 쓰는 그런 의사였다. 두 단어를 부정적으로 표현했을 때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낭만이 인생의 궤도 자체가 달라지는 '탈선'이라면 플렉스는 인생 속에서 잠시 벗어나 즐기는 '일탈'이랄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혼자 신이 났다. 그러다가 낭만도 없고 플렉스도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금세 사색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교수님들의 대화는 어느새 '꼰대의 정의'로 넘어와 있었다. '낭만이고 플렉스고 뭐가 중요한가, 행복하면 됐지.' 살던 대로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