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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Nov 29. 2020

소녀들이여, 과학을 가져라!

책 <랩 걸>과 시트콤 <빅뱅이론>

"여자는 문과, 남자는 이과"

지금이야 많이 옅어졌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이는 꽤나 보편적인 프레임이었다.

심지어 약 1년전까지도 '성별에 따른 과목별 성적 격차'에 관한 신문 기사가 나올 정도이니, 진짜로 성별에 따른 과목별 성적 격차가 있는지? 정말로 남성이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과목에서의 성취도가 더 뛰어난지? 는 오래된 질문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여전히 이과를 선택하는 여학생의 비율이 남학생의 비율보다 낮은 것은 사실이다.

<대학미래연구소>의 설문조사 결과

즉, 이공계에서는 여성이 매우 '소수'에 속한다는 것.


필자는 고등학교는 문과로 졸업하고 대학은 이학계열로 진학을 했다.

특히 내가 졸업한 대학교는 약간 특수한(?) 대학교였는데, 총 학과 수가 적은 편이었으며 대부분이 공학계열이었다. 즉, 학교가 매우 남초였다....

학교에서 치마를 입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도 신입생 때 들어보았으니. 학교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공학대학교 같은 곳이었달까.


이 남초인 학교에서 나는 대학원 과정까지 밟게 되었고, 다니던 연구실의 같은 층에 여자가 나를 포함하여 2~3명 정도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학생식당 안에 홀로 여성으로서 존재했을 때도 종종 있었더랬다.


이처럼 여성 공학자, 혹은 과학자가 현실에서 꽤나 희귀한 인물인만큼, 안타깝게도 미디어 속에서도 여성이 과학자나 공학자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참 드물다.

오늘은 여성 과학자를 그려낸 두 가지의 미디어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바로 책 <랩 걸> 과 시트콤 <빅뱅이론>!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멋쟁이 그녀, <랩 걸>의 호프 자런


<랩 걸>은 호프 자런의 자전적 이야기로, 어린 시절부터 대학교 최초의 명예교수가 되기까지 자신의 삶을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도 위트 있는 문체로 풀어나간다.

이 책의 구성이 매우 독특하고도 매력적인데, 생물학 전공인 저자가 나무, 뿌리, 열매와 같은 것들의 과학적 특성에 인문학적인 인사이트를 더해서 이론적 지식을 서술하다가, 이를 자신의 삶과 연결지으며 자전적 이야기로 넘어가는 구조를 띄고 있다. 그야말로 그녀이기에 쓸 수 있는 글인 셈이다.


제목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고 이야기했는데, 바로 저자인 호프 자런이

여성 과학자

연구 과학자

순수 과학자

하나만 갖고 있어도 세상 살기 참 어려운(?) 이 이름을 모두 보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놀이터보다는 연구실을 더 가까이해서, 마치 과학이 운명처럼 삶에 새기어진 사람이다.

이후로 생물학을 전공하고 석·박사 학위를 취득, 평생을 연구 과학자로 살기 위해서 치열한 과정들을 헤쳐 나간다.

왜냐하면 순수 과학에 지원하는 돈은 정말 '순수'하게 지출되어야 하기에, 그렇게 많은 자본이 순수 과학을 위해서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선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여성 과학자로서 받게 되는 편견 어린 시선까지도 극복해내야 했으니.


과학 분야의 교수에게 무엇이 가장 걱정인지 물어보라. 길게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면서 한 마디로 대답할 것이다. "돈이요." (p.179)


하지만 그녀는 생물학에 대한 열정으로 이 모든 과정들을 조금씩 조금씩 뚫어 나간다.

생물학과 과학에 거의 반은 미쳐있는 그녀이기에, 그 광기로 이끌리는 인생이 꽤나 스펙터클하고 그 안의 사건들도 흥미진진하다. 여기에 더해서 너드미 충만한 이과식 개그들까지...!!!! (취향저격!!)


여기에 더해 그녀가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으면서 겪게 되는 - 연구자로서의 삶과, 엄마로서의 삶 사이의 충돌. 일을 너무 사랑하는 그녀가 동시에 아기를 사랑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갈등들.


이 모든, '여성'이기에 겪는 마음들과 '과학자'로서 겪는 일들이 담백하고도 깊이 있게 담겨져 있다.


그녀가 온전히 실력으로서, '대학 최초의 명예 교수'와 같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다는 점도 멋지지만

나에게 그보다 더 인상깊게 다가왔던 점은 그녀의 글 곳곳에, 전체에 묻어나는 과학과 자연에 대한 진한 애정이었다.


이런 속도로 건강한 나무를 베어내는 것을 계속하면 지금부터 600년이 지나기도 전에 지구상의 모든 나무들이 그루터기만 남을 날이 올 것이다. 우리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이 엄청난 비극에 대해 누군가는 걱정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p.400)


이런 애정을 가진 이라면 어찌 성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는 ‘여성’ 무엇무엇이 아니라 그냥 과학자로, 연구자 그 자체로도 정말 멋진 사람이다.

그래도 '여성 과학자'이기에 느꼈던 지점들 또한 책에 잘 녹아들어가 있어서,

이과녀들에게 특히 강력하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


그런 말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내가 여성 과학자이기 때문에 누구도 도대체 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따라서 상황이 닥치면 그때그때 내가 무엇인지를 만들어나가면 되는 값진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p. 397)

> 그 정도로 ‘여성 과학자’가 저자가 있던 학계에서 마치 유니콘 같은 존재였음을 알려주는 부분.


어쩌면 시트콤 <빅뱅이론>의 메시지: "해 보라고요"


내 최애 드라마, 인생 드라마, <빅뱅이론>.

시즌 12의 마지막화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아직 쉘든을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계속 아껴두다가,

기분이 가장 좋지 않고 우울했던 날에 마지막화를 보았다.


시즌 1부터 12까지, 정말 긴 시간을 끌어왔던 시트콤이었기에 '마지막화'를 만들 때 제작자는 <빅뱅이론>을 이때까지 만든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등장인물 '에이미'와 '쉘든'의 대사에 그 메시지가 모두 녹아들어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무려 그 중의 하나가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빅뱅이론>에는 여성 과학자가 두 명 나온다. '에이미'와 '버나데트'.

둘 다 재미있게도 남자친구보다 더 똑똑하거나, 동등하게 똑똑한 것으로 그려진다. 또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후반 시즌에서는 에이미를 통하여 꽤나 지속적으로 나온다.

아마 버나데트는 약학 회사의 사원이고, 에이미는 대학에서 근무하는 진짜 '연구 과학자'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성 과학자가 둘이나! 그것도 한 명은 잘나가는 회사 사원으로, 한 명은 과학에 대한 애정이 깊은 연구 과학자로 나오는 것도 참 좋았는데, 에이미가 마지막회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너드들의 이야기로 출발해서, 여성 과학자에 대한 담론으로까지 이야기를 확장해낸 <빅뱅이론>.

미국의 여자 중학생 누군가는 <빅뱅이론>을 보며 과학자에 대한 꿈을 새록새록 키웠을지도 모른다.

이 시트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최근 미디어 업계의 가장 핫한 주제는 아무래도 '여성 서사'일 것이다.

성적 감수성을 얼마나 잘 충족시키느냐, 여성이 서사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주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느냐가 드라마 성공의 중심을 잡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이 여성 중에서도 소수, 하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될 이야기.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쯤 한국에서 볼 수 있을까?

사실 아직까지 한국 드라마에서는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언론계, 법조계, 상경계 등으로, 문과 계열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따지고보면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더 먼저인걸까?

그래도 최근 <스타트업> 남도산 캐릭터의 등장이 내 눈에는 실낱 같은 희망과 같이 보인다.


우리의 브라운관에도 공대남, 공대녀, 과학자, 여성 과학자가 등장할 그 날을 꿈꾸며!

그를 보며 한국의 여자 중학생들이 연구 과학자로서의 삶을 꿈꾸는 그 날이 오길 바라며.


일단 지금 당장은, 대한민국의 모든 이과녀들 화이팅!



참고자료: https://www.mk.co.kr/news/special-edition/view/2019/01/46608/

<랩 걸>, 호프 자런, 알마 (2017)

<빅뱅 이론> 시즌 12 EP. 24 (왓챠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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