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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Oct 28. 2020

<보건교사 안은영>:나는 영웅인데.. 정작 나는 몰라!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속 특별한 영웅관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 공개 전부터 수많은 화제를 모으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불러일으켰더랬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으면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는 드라마였는데.. 오늘의 이야기는 <보건교사 안은영>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 이정도로 마무리.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이경미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많이 나왔듯이 ‘여성 히어로물’이다.

그런데, 이 히어로에게는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분명히 그녀는 히어로인데, 목련고를 구원할 영웅인데, 정작 은영은 그것을 거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


은영의 서사를 보면 이러한 태도가 이해 된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젤리를 봐서(말이 젤리지 안보이는 사람에게는 귀신을 보는거나 다름이 없다!) 학교 친구들에게 내내 따돌림을 당했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 게다가 젤리를 퇴치하는 것이 영 쉬운 일도 아니다. 주무기인 비비탄 총, 장난감 칼은 주기적으로 충전이 필요하고, 무찔러야 하는 대상인 '젤리'는 이름이 귀엽다고 해서 그 존재까지 귀여운 게 아니다. 작은 벌레 같은 젤리부터 은영의 10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징그러운 두꺼비 모습의 젤리까지. 젤리와 싸우는 것이 결코 쉬워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젤리를 차마 그대로 둘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로, 때문에 그야말로 꾸역꾸역, 눈 앞에 보이는 젤리를 ‘어쩔 수 없이’ 제거해가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꾸역꾸역 젤리를 제거하는 그녀는, 결과적으로 젤리를 자신들의 돈벌이와 이익에 이용하려는 <안전한 행복>과 <일광소독> 사이에 낀 유일한 영웅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아무래도... 그녀의 운명인 것 같다. 바로 목련고를 거대 젤리 조직으로부터 구해내는 것! 학생들을 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그녀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많은 히어로들은 의지를 가지고 선한 일을 행하곤 한다. 물론 위기와 갈등은 존재하지만, 어쨌든 대부분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 ‘싶은’, 능동적인 영웅들이다. 어벤져스도 자발적인 모임이었고, 배트맨도 고담시를 구원하기 위해 재산까지 쏟아붓고. 한국판 영웅인 홍길동도, 가까이는 드라마 <킹덤>의 세자 이창도, 본인의 의지가 영웅 서사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하지만 은영은 이런 히어로와는 다르다. 뭐랄까, 그녀의 현생과 운명이 묘하게 결합된 느낌이다. 그녀는 분명 목련고를 애써서 찾아가지 않았는데, 가봤더니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지 않았나. 그녀는 그저, 보건 교사로 일하면서 조금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었는데! 거대한 젤리의 비밀 같은 거,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이런 은영의 심리는 <보건교사 안은영>의 후반부에 아주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

되려고 한 적도 없는데 이미 영웅이 되버린 슬픈 운명! 사실, 이것이 히어로 은영이 지닌 참매력이다.


사실 은영 외에도 이런 '운명적 영웅'은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 <해리 포터 시리즈>의 해리 포터가 대표적인 예시다. 프로도도 스스로 반지를 파괴하고자 그것을 직접 찾아나섰다기 보다는 반지가 그를 찾아온 운명에 놓여졌던 것이며, 해리 포터 또한 신탁(?)에 의해 억지로 볼트모트에 대적해야만 하는 영웅이 되었더랬다. 이렇게 놓고 보니 아이언맨, 배트맨 같은 능동적 영웅 못지 않게 운명적 영웅도 꽤나 큰 사랑을 받는 캐릭터인 것 같다.


이런 영웅에게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기를 얻었던 무한도전 속 '하하 세계관'처럼, "나는 훌륭한데 정작 나는 그것을 모르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매력적이기 때문일까?

사실 그런 이유도 영 없진 않겠지만, 나는 이러한 상황이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대부분 나에게 주어진 일, 해야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곤 한다. 심지어 하고 싶은 일이 진짜 일이 되면 고통으로 변모하기도 하니... 인간이란 게 애초에 해야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이런 우리의 상황을 넓-게 보면, 이 해야하는 일들이 일종의 내 인생에 주어진 운명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현재적 운명'.


나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인데 영웅이 되어버린 캐릭터들은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해야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니까 사는 너. 네가 있는 자리를 하루하루 지키며 살아가는 너. 그런 너가 나와 같은 영웅이라고".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무진장 사소해보여도 넓게 보면 조금은 이 사회에 이바지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회의 영웅.

지금 하고 있는 이 일, 이것으로 번 돈으로 우리 가족이 먹고 살지.
그렇다면 우리는 내 가족의 영웅.

이처럼 현재적 운명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영웅적인 요소들이 분명히 깃들어 있는 것이다.

꼭 사회를, 세계를, 인간의 목숨을 구해야만 영웅인가?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도 넓게 보자면 그런 일이 충분히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은영과 프로도, 해리 포터를 빌어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다.

이제껏 몰랐겠지만 당신은 분명, 누군가의 영웅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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