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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Nov 09. 2020

가나안으로 가는 길

신명기 28장부터 29장까지

<날마다 솟는 샘물>로 큐티를 한다. 10월부터 이번 달인 11월까지 쭉 <날마다 솟는 샘물>의 본문은 신명기다.

신명기 중 지금 본문에 해당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입성하는" 부분이다.

애굽으로부터 나와서, 긴긴 시간동안 광야를 돌다가, 드디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 '가나안'에 입성하는 부분. 가나안에 입성하기 시작하는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함을 강조하신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읽다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가나안은 지명이었을까? 부산, 대구, 샌프란시스코 뭐 이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이 정확히 어디인지를 알고 그곳으로 향했던 걸까?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았다.

성경 본문을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는 조심을 해야한다. 이단 종교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그래도 공신력이 있을 것 같은, <크리스천 투데이> 신문 기사에서 가나안에 대한 설명을 발견했다.


가나안(Canaan)은 히브리어로 '케나안'인데 이는 '법률, 혹은 평평한 땅'을 뜻한다. 

최근 들어 학자들은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가나안족의 고향 혹은 정신적 명사로 상징되는 이름이라는 해석을 지지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가나안족에 대한 정확한 규명은 결론나지 않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가나안 7족만을 가나안족으로 삼아야 할지, 그들이 살았던 지역은 또 어느 곳인지에 대해 우리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론적으로, 가나안은 '가나안족의 고향'인데, 그 '가나안족' 또한 뚜렷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 속의 '가나안족'은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가나안이라는 이름으로 시대마다 지역마다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는 이들은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시종일관 괴롭히고 성가시게 한다. 결국 그들의 유일한 공격 대상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었다. 족보상으로는 분명히 가나안은 노아의 후손으로서 동족의 피를 나누고 있지만, 이들에게 있어 이스라엘은 오직 원수일 뿐이다. 
가나안인의 신들은 히브리 문학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었다. 오직 현세에서의 번영과 자손의 축복을 기원하는 대상으로 존재한 가나안 신들은 이스라엘을 현혹하기에 다채롭고 매력적인 우상으로 군림했다. 이를 위해 가나안 신들은 매춘행위를 종교적 의식으로 격상시켜 매춘에 대한 죄의식을 무디게 했다.


즉, 가나안 혹은 가나안족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적'이었으며, 하나님이 아닌 신을 섬기는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이스라엘과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결국은 이스라엘과 어느정도의 공통성 혹은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기독교인들에게 충격적인(?) 사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흔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정도로 인용되기 때문이다. 뭐랄까, 가나안의 이미지가 주석에서 말한 것처럼 거칠고 위험한 느낌이 아니라 안락하고 풍요로운 느낌으로 많이 사용된다고 해야하나.

가나안에 물론 풍요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풍요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나안은  하나의 이상향이자 소망의 대상이지만 실제의 가나안은 안락함이 있는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 치열한 전투장이고, 음행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타락의 땅이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저주받은 땅으로 등장한다.
가나안 땅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온갖 우상숭배와 음행과 타락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땅이요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이 '가나안'을 현대적으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어쩌면, 교회 밖의 모든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성경 속에서 말하는 선한 가치들이 문화로서 자리 잡지 않은 모든 곳이 '가나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세상에는 물질적인 풍요로움까지 존재하니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그야말로 가나안이 아닐까.




현재 나의 사회적 위치는 '취준생'. 즉, 일할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고 있는 신분이다.

이런 나의 상황이 마치 가나안으로 향하는 광야길에 있는 이스라엘과 같다는 생각이, 이 본문을 읽으며 많이 들었다.

다른 문화가 존재하는 곳,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지 않은 곳.

하지만 풍요로움 또한 존재하는 곳.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 어딘가의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는 길목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그들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주시고,

하나님 없이는 애굽에서의 구원도, 가나안의 정복도 없음을 알려주셨듯이. 나 또한 그런 시간들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내 힘을 빼는 시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시간,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이끄시고 있다는 믿음이 자라나는 시간. 그런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만 같다.




가나안에 도착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라고.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 나에게도 필요한 말씀인 것 같다.

그 곳이 어디이든지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새겨야 한다고. 말씀을 새긴 내가 가나안에 세워질 하나님의 비석이 되어야 한다고. 그것을 잃으면 안된다고.


향방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때가 정말 길었다.

이제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에게 설레임으로 다가오곤 한다.

어디일까, 나에게 주실 가나안 그 땅은. 어떤 땅일까,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까,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무엇일까.



나는 지금,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 길목에 있다.


주석 출처: 크리스천 투데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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