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객관화하는 연습
어느 여름날이었다. 매년 있어왔던 의식과도 같이 나는 올해 겨울도 방콕에서의 휴가를 그리고 있었다. 머리 한번 잘 써서 똑똑한 컨슈머가 되어 볼 거라고 나도 고수들이 도전한다는 마일리지를 돈 주고 사는 위험한 거래를 하고 있었다. 원래 이 마일리지는 남미를 조금 더 편하게 비즈니스로 갔다 오려다가 결국 표를 구하지 못하고 2년이 지나면 마일리지가 사라져 할 수 없이 표가 있을 때 울며 겨자 먹기로 끊게 된 방콕행 티켓이었다. 중간에 같이 갈 친구들이 있었지만 결국엔 날짜가 흩어지는 바람에 어영부영 혼자 떠나게 되었다. 뭐 오랜만에 혼자 하는 여행, 익숙한 도시에서의 혼자 하는 여행도 필요한 시간이었다.
에어비앤비를 묵었는데 주인이 자꾸 택시는 줄도 기다리고 번거로우니 600밧을 주고 자기들이 운영하고 있는 택시 서비스를 이용해달라고 했다. 너무 여러 번 푸시하길래 나는 항상 그랩 잘만 이용했고 400밧대로도 이용했었는데 500바트면 간다고 했고 딜은 성사되었다. 결국 집주인 편하자고 시간은 시간대로 까먹었다. 그래도 늘 익숙한 도시의 공항이라 일말의 당황함도 없이 약속 장소였던 3번 게이트까지 한참을 걸어서 기다리고 몇십 분을 까먹고 또 겨우 만나 주차장에서 차를 빼느라 기다리고, 집주인 집 앞에서 열쇠 받느라고 기다리고 엉망이었다. 지하철에선 가까웠지만 방콕의 에어비앤비를 묵을땐 그랩푸드 딜리버리의 거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중심가에 묵길 추천한다.
방콕 출발하기 전 공항에서 나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여행의 바로 직전에 나의 삶은 언제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청천벽력 같은 전화 한 통을 받고, 황당함과 당혹함의 콜라보레이션 속에서 치밀하게 나는 나의 멘탈을 치유하고 있었다. 항상 방콕에선 탄스파가 가장 만족스러웠는데 판퓨리 스파가 탄스파보다 한수 위라고 해서 판퓨리를 당일 예약으로 찾았다. 엄청난 뷰와 시설에 압도당하고 놀랐다.
몸이 너무 안 좋아 한 끼도 먹지 못하고 마사지를 받으면 완전 녹다운될 것 같아서 과일 스무디를 하나 시켰다. 정성 가득한 디피와 분위기 속에서 스무디를 훌러덩 들이키고 정신이 좀 들었다. 판퓨리 스파의 엄청난 뷰가 너무 좋았으나, 엄청난 뷰를 마사지를 할 땐 볼 수 없기에 사실 탄의 캄캄한 뷰나 큰 차이가 없어서 더 황당했다.
서비스의 질은 확실히 판퓨리가 한 단계 위지만, 마사지를 통해 받는 희열은 판퓨리보다 탄이 전반적으로 나에게 더 와 닿았다. 그냥 한눈팔지 말고 탄으로만 직진하자 마음먹었다. 마사지를 받고 안 좋았던 몸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판퓨리 스파에서 이것저것 화장품들도 써보고 사 오고 싶었는데 탄에 비해서 룸에 디피되어 있는 것들도 적어서 분위기도 조금 휑한 감이 있어 매장을 빨리 나오게 되었다. 어딜 가나 방콕은 수박 인심이 야박하지 않아 좋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수박은 내가 부자가 되는 기준이기도 하다. 가격표를 보지 않고 사시사철 가장 맛있는 수박을 냉장고에서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것이 내 삶의 부자의 척도이다. 그래서 나는 늘 방콕에 오면 추운 겨울의 날씨에 수박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부자 놀이를 미리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방콕의 몰은 여느 동남아의 몰과 다르지 않았다. 확실히 몰 자체의 컨텐츠는 방콕이 한국보다 더 뛰어나다. 아이콘 시암만 해도 그렇고 엠포리움도 나무와 조경 그리고 동선들은 훨씬 방콕이 우세하다. 카페 문화도 방콕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음을 느끼게 한다.
스타벅스를 갔는데 하나 사면 하나를 공짜로 어떠한 음료든 제공하는 날이었다. 오후 6시쯤 1일 1식을 하러 밥 한 끼 먹고 커피 한잔 테이크 아웃하려고 하다가 괜한 사치로 디카페인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왔다. 길거리에서 그냥 아무 팟타이도 맛있겠지 하고 주문했는데 더럽게 맛없었던 팟타이였다. 카페에서 후식으로 빵을 사 왔는데 빵을 안 사 왔으면 정말 강제 단식할 뻔했던 식사였다. 원래는 5시까지 기다력서 팁싸마이를 딜리버리 하려고 했었는데 아무리 어플을 깔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알고 봤더니 우리 에어비앤비가 너무 팁싸마이에서 멀어서 뜨지 않는 것이었다.
마카롱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삐에르 에르메의 마카롱은 특별한 디저트다. 마카롱 특유의 쫀득한 지겨운, 상상이 되는 달콤함이 삐에르 에르메의 마카롱은 욕튀 어나 올 만큼 비싸지만, 뻔하지 않은 기분 좋은 달콤한 식감의 마카롱이라 항상 삐에르 에르메가 보이면 하나씩 마카롱을 겟하곤 한다.
센스 있게 디카페인도 일반 카페에 있으면 그렇게 반갑다. 괜히 유투버 따라 하기 놀이나 해본다고 아무 생각 없이 화면 앞에서 뭐라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우유라고 생각해서 저 작은 주전자에 있는 걸 부웠는데 시럽이어서 저 커피를 영원히 마시지 못했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skt 로밍은 돈 아깝다고 안 했는데, 평일에 가는 휴가다 보니까 반 휴가 반 일정이었다. 마사지받으면서도 틈틈이 핸드폰을 확인하고, 밥을 먹을 때도 핸드폰과 같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릴랙스가 되고 틈틈이 쉬어주니 충분히 감사한 휴식이었다. 브런치는 유명세에 비해서 그리 감동하진 않았다.
싱가포르 공항에서 늘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저 계란 노른자 감자칩이 태국에까지 진출했다. 계란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한번 먹어봤었는데 너무 리치하고 비싸고 그냥 감자칩은 뭐니 뭐니 해도 포카칩 어니언 맛이 최고다. 체크인이 3시까지라 미리 앞에 있었던 에어비앤비에서 12시까지 체크아웃을 마치고 남은 2시간 동안 엠포리움에서 밥을 먹고 수박도 사 오고 3시에 맞춰서 룸에 들어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핸드폰을 충전하며 일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사지 가게가 크게 있어 1시간짜리 타이 마사지를 제대로 받았다. 중간중간 한국에서 걸려 오는 전화가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너무 시원했던 마사지였다. 2만 원 3만 원에 몸을 제대로 풀고 나면 구름 위를 걷는 듯 시원하다. 평소에 그만큼 혈액순환이 이뤄지지 않아서일까 생각도 해봤다. 운동을 시작해야지 마음만 먹고 있다가, 또 이렇게 새해를 맞이한다.
잘 정돈된 베딩을 바라보고 몇 시간째 테이블에 앉아 일만 했다. 그래도 이곳이 익숙한 동네 프롬퐁이고 방콕이라는 것이 좋았다. 수영장엔 갈 수 없었지만, 기지개를 하며 사람들이 태닝을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휴식이 되었다. 그리고 대망의 5시가 되자마자 딜리버리 어플을 켜서 팁 싸마이를 주문했다. 두 개 시켰어도 충분히 둘 다 격파할 수 있는 양이다. 항상 동남아 출장 올 때마다 느끼는 게 양이 너무 작다. 그런데 내 입맛에 막 맞지 않아 그만큼 양만 먹어도 충분히 배는 안고프다. 그리고 항상 그 밥이 아쉬워 주전부리를 찾게 된다. 팁 싸마이는 여전히 맛있었고 오렌지주스도 좋았다. 끝 맛이 약간 화학약품 처리된 조미료 맛이 나긴 하지만 이 정도면 훌륭했다. 그리고 뭔가 이 맛이 그리울지 몰라 소스도 두 개 사 왔다. 굳이 큰 새우가 들어간 팟타이를 시킬 필요 없을 것 같아 작은 것으로 시켰는데 충분했다. 이미 기업화된 레스토랑을 보고 사업을 할 때 이 모든 것들이 체계화하고 기업화하기 위해서 하나하나 단계별로 이뤄져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친구 약속이 있어 엠포리움으로 향하는데, 사람들이 하나같이 길거리에서 태국 차이 라테를 시켜서 나도 한번 사 먹어봤다. 20밧에 연유 그득 넣고 설탕에 우유 한가득 넣어서 얼음에 주는 건데 진짜 달면서 맛있었다. 800원인데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카페인이 들어간 건 절대 안 먹어야지 했다가 이건 좀 특이하고 맛있는 맛일 것 같아서, 몰 안에 들어가서 파우더를 사 왔다. 음료도 하나 시켰는데 연달아서 음료를 두 개 먹었더니 당이 올라서 중간에 몇 입 먹다가 도저히 못 먹고 버렸다. 한국에서 사 왔는데, 연유를 넣지 않고 우유 대신 물을 넣어서 그런지 그때의 그 감동적인 맛은 아니었다.
태국 전통 국수인데 짜보이지만 절대 짜지 않았고 맛있었다. 태국에 갈 때마다 늘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들과 근황도 이야기하고 1시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사촌 결혼식을 앞두고 바쁜 스케줄에도 나를 만나러 와준 친구들이 감사했다. 늘 우리의 수다는 끝이 없다. 그리고 참새가 방앗간 지나가듯, 겨울의 태국을 연례행사처럼 오는 가장 큰 이유인 태국 올가닉 샴푸를 사러 시암센터로 향했다. 베라 이탁이라고 베트남 스타일의 프라이탁에 꽂혀 지인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실컷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태국의 태라 이탁도 지퍼 등의 디테일이 조금 더 첨가되면 더 예뻐질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살까 하다가 디테일에 비해 10,000원의 금액이 비싸 올해 또 잘 쓸 샴푸와 바디 클렌저만 사 왔다.
호텔로 돌아가는데 은근히 거리가 있어 한번 묵어보고 싶었던 호텔의 특가가 나와서 묵었던 것이지만, 나는 아무리 다른 방콕의 좋은 호텔 다 돌아다녀봐도 프롬퐁 역의 힐튼이 최고다. 걸어가는데 엄두가 나지 않아 20밧을 주고 수박을 사 먹었다. 한국에서 돈이 모자라면 환전을 해야지 했었는데 태국 돈 4만 원, 5만 원 정도로도 길거리에서 이것저것 사 먹고 마사지 팁 드리고 하는데 충분했다. 캐리어를 끌고 돈이나 아낄꼄 시간도 많은데 한 번도 도전하지 않은 공항철도나 타보려고 하다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공원 앞에서 연유 가득 들어간 팬케이크를 먹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이 들어갔더니 천천히 먹었는데도 이미 심장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공항에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했었다. 사실 마사지를 오늘 받았지만 누크에서 진짜 센 제대로 된 마사지를 받아서 정신을 못 차려서 다시 못 받은 것도 있었고, 이름과 성이 마일리지로 표를 사면서 바뀌어 있어서 혹시 탑승이 거부되거나 새롭게 표를 끊어야 할까 봐 신경 쓰여서 공항에 5시간 일찍 갔었다. 12시 비행기였던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과 거의 함께 줄을 기다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운 좋게 좋은 승무원분께서 표를 잘 처리해주시고, 1시간 30분 있다가 오라고 하셔서 남은 돈을 쓸 겸 아래층 딘앤 델루카로 갔다. 방콕에서는 스타벅스보다 딘 앤 델루카를 더 자주 찾게 된다.
아시아나 라운지는 pp카드 라운지와 동일해서 차별점이 하나도 없었고, 구기재라서 180도 풀 플랫이 아니라 잠도 제대로 청하지 못했다.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4시에 비행기를 타는 바람에 너무도 피곤한 비행이었다. 디카페인 커피로 여독을 풀고, 겨우 한 시간 눈을 붙이고 결국엔 짜디짠 죽과 더 짠 라면을 한번 시켜봤다. 다들 라면을 시켜서 많이 불어 나왔다. 짐이 빨리나 와서 참 좋다 생각했고, 리모와로 바꾸고 나서는 늘 걸리는데 명품 1도 안 사 오는 나는 늘 당당했다. 이번엔 비지니 스니까 더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내 리모와 디자인도 짝퉁도 너무 많아지고 흔해져서 걸리지 않았다. 결국 하루를 다 날리는 것처럼 오후 내내 잠을 잤다.
여행은 늘 즐겁다. 그리고 어떠한 고민을 안고 떠나는 방콕이지만 매년 겨울 찾는 방콕은 늘 새로운 힐링을 가져다준다. 또 올해가 지나간다. 많은 것을 배우고, 고민했고, 얻었다. 또 그만큼 잃은 것들도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을 가지려는 것 자체가 욕심이었음을 깨달은 한 해였다. 누구보다 단단하게, 누구보다 정직하게, 누구보다 진솔하게 내 식대로 나의 세상을 현명하게 드로잉 할 준비를 마쳤다. 즐거울 수 있도록,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도록 나아가면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