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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a의 의사, 진실을 찾아

근대적 의학 정신의 개척자, 가르시아 드 오르타 02

by 마싸

Portugal, Português! 포르투갈, 포르투게스!

낯선 장소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고 생경한 풍경에 감탄하는 것은 여행자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제일 생생한 것은 역시나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알게 된다면,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시야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는 서로 유라시아 대륙의 끝과 끝에 위치한 먼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 포르투갈에 대한 '한 꺼풀 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식으로 전합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njj0772/135



고아Goa의 의사

고아에서 오르타는 왕의 궁정의사로 활동했다. 동시에 그는 시장과 들판을 누비며 현지 약초상과 의사들을 만났다.


“이 잎사귀는 어떤가요?”

“열을 내리고, 기침을 멎게 하지. 그러나 너무 많이 쓰면 독이 된다.”

“그렇다면 제가 알아왔던 유럽 의학 이론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겠군요.”


이러한 대화들이 모여 그의 대표작, 『Colóquios dos simples e drogas da Índia』(인도의 약초와 약물에 관한 대화, 1563)가 탄생했다.

책은 대화체로 이루어졌다. 오르타 자신과 가상의 방문자가 서로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유럽인들이 인도에서 접하는 향신료와 약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후추, 계피, 생강, 카다멈 같은 향신료부터, 당시 유럽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약초들까지.

그는 단순히 ‘이롭다’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관찰하고, 때로는 환자에게 투여한 경험까지 상세히 적었다.


Garcia_de_Orta_Coloquios_1563_tp_Torre_do_Tombo.jpg 『Colóquios』 원전 표지 (1563, 고아 인쇄본)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고아에서 찍혀 나온 작은 책, 그러나 세계를 바꾼 식물학의 목소리가 되는 책입니다.


“Não me ponhais medo com Dioscórides nem Galeno, porque não hei de dizer senão a verdade, e o que sei”

“나를 디오스코리데스Dioscórides나 갈렌Galeno으로부터 위협하려 들지 마십시오. 저는 진실과 제가 아는 것만을 말할 것입니다.”

- Colóquios, 제9회 중


그의 글 속에서 울려 퍼지는 이 선언은, 곧 근대 과학의 문을 여는 서곡과도 같았다. 기존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에서 얻은 사실—여기서 “진실”과 “내가 아는 것”—만을 서술하겠다는 선언은, 근대적 과학 태도이자 사회적 자존의 표현이었다.



그림자

그러나 고아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1536년 본국에 종교재판소(Inquisição)를 세웠고, 1560년, 인도 고아에도 별도의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위협하는 모든 것은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특히 신(新) 기독교인들은 주요 표적이었다.


오르타는 궁정의사로 왕의 보호를 받았기에 직접적인 탄압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의 이름도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가족들 중 일부는 이미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유대적 배경은 숨길 수 없는 꼬리표였다.


'나는 의사이지, 신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혈통을 죄라 부른다...'

그는 마음깊이 탄식했다.

1568년, 오르타는 고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는 존경받는 의사였고, 유럽 학문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었다.


Francisco_de_Goya_-_Escena_de_Inquisición_-_Google_Art_Project.jpg 종교재판 장면 (Auto-da-fé, : Francisco Goya, c.1815)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몇 세기 후, 고야가 그린 종교재판 그림입니다. 다른 나라, 다른 시간에서도 '종교' 혹은 다른 명목하에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일은 비일비재했지요. 이 그림을 그린 고야 자신도 그의 작품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었습니다.



사후의 재판

그가 죽은 지 12년이 지난 1580년, 고아 종교재판소는 그의 무덤을 파헤쳤다. 그를 이단자로 단죄하고, 유골을 불에 태워 재로 만들었다. 죽은 자에게도 자유와 존엄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오르타가 남긴 저서는 오히려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Colóquios』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학자들과 의사들에게 널리 읽혔다. 이후 식물학과 약리학, 열대 의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그는 ‘이단자’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 과학 교류의 선구자, 근대적 의학 정신의 개척자로 기억된다.

그의 이름은 불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불길 속에서 되살아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사 속에서


고아 종교재판소(Goa Inquisition)

1536년 본국의 뒤를 이어, 1560년에 인도 고아Goa에 설치된 종교재판소의 명목은 가톨릭 신앙 수호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신기독교인(cristãos novos), 즉 개종한 유대인 출신들, 인도인 개종자들(힌두교·이슬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경우), 기독교 교리를 비밀리에 따르지 않는 이들 등을 집중적으로 탄압했죠. 리스본 종교재판소 감독 아래, 고문·자백 강요·재산 몰수·화형 등 스페인/포르투갈 본토와 같은 방식이 적용되었습니다.


가르시아 드 오르타는 1568년에 자연사했습니다. 하지만 1580년 고아 종교재판소는 오르타의 가족과 그의 유산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누이 카탈리나 드 오르타(Catarina de Orta)와 매형은 '비밀 유대교 신앙' 혐의로 기소되어 화형 당했죠. 오르타 자신은 죽은 지 12년이나 지났지만, 종교재판소는 그의 무덤을 파헤쳐 유해를 불태웠습니다. 이미 사망한 인물의 유해를 파괴하고 불태운다는 것은, 종교재판이 단순한 사법 절차가 아니라 공포 정치와 상징적 단죄를 수행했음을 보여줍니다.


포르투갈 본토와 마찬가지로, 고아에도 유대계 개종자(신기독교인)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상업·의학·금융·무역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특히 동방 무역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지요. 식민지 사회에서 신기독교인의 부와 네트워크는 '구(舊) 기독교인들(본토 출신 가톨릭인)'의 질투와 불안을 불러왔습니다. 종교재판이 단순히 신앙 문제를 넘어서, 경제적 경쟁자 제거와 재산 몰수라는 실질적 목적을 띠기도 한 배경입니다.


또한 고아 종교재판은 단순한 식민지 장치가 아니라, 포르투갈 가톨릭 왕권이 아시아에서도 동일한 권위를 행사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제국 모두에서 당시 '종교적 일체성=정치적 충성'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고아에서 종교재판을 운영한다는 것은 '제국은 리스본에서 뻗어 나온 하나의 신앙 공동체'라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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