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궁금해! 04 - 김치냉장고
2016년 한국 여자와 결혼하기 전엔, 한국은 "Korean War, IT, K-pop" 정도만 알았던 포르투갈인 신랑이 한국에 와서 궁금해하는 별별 것들. 그리고 거기에 답하다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한국 이야기.
신랑이 제일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2가지.
하나는 내 남동생이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고, '누나'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
(가족끼리 이렇게 깍듯?!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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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친정의 김치 냉장고였다.
김치는 나와 만나고 나서 생전 처음 먹어봤다는 신랑은, 처음에 좀 낯설어하더니 금세 맛있다며 잘 먹기 시작했다. 지금도 제일 잘 먹는 한식은 구운 김에 쌀밥, 그 위에 김치를 얹은 것, 그리고 미역국이다. 하여간 그 김치만을 위한 냉장고가 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는지, 포르투갈 집에 돌아갔을 때도 가족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그리고 또, 김치만을 위한 냉장고가 있었어요."
(포르투갈 가족들) "김치?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그게 뭐지?"
"음... 매운 사우어크라우트*라고 하면 좀 비슷하려나? 매운 발효 배추절임이에요. 시고 맵고. 그리고 한국인들이 무척 자주 먹고, 중요하게 생각해요. 우리가 매끼 치즈 먹는 것처럼, 김치도 매끼마다 먹을 때가 많대요"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 잘게 썬 양배추를 발효시켜 만든 시큼한 맛이 나는 독일식 양배추 절임)
가족들의 표정과 대화를 보아하니, 김치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용 냉장고가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니! 무척 대단한 것인가 보다!라는 인상을 받은 듯. 신랑 역시 마찬가지.
김치가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중요하기도 하지만, 일정 온도에서 저장이 필요한 식품이기에 김치 전용 냉장고는 필요에 의한 발명품이다.
전통적인 김치 보관법은 익히 알다시피, 땅을 파서 김칫독을 묻는 것. 이는 땅 속의 온도가 일정해, 김치 신선도를 유지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 찾아보니 이 온도가 0도~영하 1도 사이란다. 그러나 기존 냉장고는 내부 온도가 상승하면 냉매로 온도를 떨어뜨리는 방식이어서 온도 변화가 크기에, 김치 맛 유지가 힘들다. 김치 냉장고는 냉장실 자체를 냉각하는 '직접 냉각 방식'으로 정밀한 온도 조절과 밀폐로 이런 문제를 해결,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고.
원리야 어찌 되었건 김치 냉장고는 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실 육류나 채소 보관에도 유용하긴 하다) 웬만한 한국 가정에서 점점 더 필수품으로 인식되고 있고, 우리 친정집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는 기존 쓰던 냉장고 역시 딱히 버리거나 처분하기에는 아깝고 애매해서 같이 쓰고 있다는 것.
편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문제는 아니다, 사실.
김치냉장고에는 각종 김치와 채소, 과일 등을 주로 보관하고, 원래 쓰던 양문형 냉장고에는 반찬, 음료, 냉동식품 등을 보관한다. 사실 동티모르 시골과 포르투갈 시골이라는, 기존 내게 익숙했던 곳에서 살지 않았더라면, 냉장고 2대라는 풍경이 다소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냉장고의 시작은, 모든 발명이 그렇겠지만, 식재료의 안전한 장기 보관이라는 '필요'에서 생겨났을 것이나, 현재의 냉장고는 좀 더 복잡다단한 도시 생활의 모습들과 연계되어 있다.
사시사철 신선하게 식품을 저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원래의 필요를 쉽게 넘어서서 많은 식품들을 사라고 은연중에 조장한다. 대형 마트에는 1+1 상품들이 흔하고, 인터넷 쇼핑을 하게 되면 배송비 절약을 위해 당장 먹을 것 이상의 양을 사게 되는 쪽이 한 축이라면... 다른 축에는 이렇게 많이 사도 저장할 수 있는 냉장고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편의와 시간 절약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간편 식품들이 나오는데, 이는 모두 냉장 혹은 냉동식품들이다. 그리고 점점 더 다양해지고 맛있어진다. 다양하고 많고 맛있는 냉장냉동식품들과 이를 얼마든지 보관할 수 있는 대형 냉장고가 사이좋게 쌍으로 돌아가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주저할 이유가 없다.
동티모르 시골에 살 때에는, 주위에 냉장고를 가진 이웃이 거의 없었다. 워낙에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인 데다가, 시골이다 보니 냉장고라는 것은 사치품이기도 하거니와,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곳도 있고, 정전도 잦으니 사실 냉장고가 있어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게다가 다들 대가족이고, 저장할 만한 식량이나 식품 자체도 많질 않으니 굳이 냉장고가 필요가 없다. 그때그때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요리해, 다같이 먹고 치운다. 행여 남는 음식은 돼지에게 먹이로 준다.
포르투갈 시골은 동티모르처럼 경제적 어려움이나 전기 사용 문제는 전혀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생활환경을 들여다보면 '냉장고에 음식을 저장하지 않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주식인 빵은 매일 동네 빵집에서 산다. 기본 채소는 텃밭에서 길러먹는 경우가 많다. 다른 채소, 과일, 고기나 생선 등은 매주 토요일 장에서 산다. 치즈나 염장 소시지는 실온 보관이니, 냉장고가 필요가 없다. (물론 생치즈나 연성 치즈 등 치즈 종류별로 냉장 보관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보통 소포장 단위로 사고팔기에, 한 번에 먹고 치우는 편이다) 빵집, 식료품점, 토요일장은 모두 마을 중심가에 있으니, 걸어가서 필요한 만큼 사면된다. 그러니 냉장고에 뭘 채워 넣을 필요가 별로 없고, 큰 냉장고가 별 필요가 없다.
냉장고는 편리한 도구이지만, 모든 편리한 도구가 그렇듯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나의 욕망과 생활패턴을 좌지우지 하기도 한다. 서울의 바쁜 직장인이자 1인가구로 살 때는 새롭고 맛있고 편한 음식 혹은 식재료들을 채울 수 있는 냉장고 (그리고 아마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김치냉장고도 살 거야!) 를 당연하게 여겨 써왔는데, 지금은 별로 필요가 없다.
다행히도, 필요한 식재료를 그때 그때 사서 먹는 지금의 생활이 좋다. 텃밭과 닭장에서 먹을 거리들을 바로 들고 오는 것도 좋다. 그런 변화가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