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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정우 Mar 06. 2016

여주

남한강의 풍요로운 물목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골,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강원도와 충청북도 산간의 무수한 구비를 휘돌아 충주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는 물길을 점차 넓히며 북서쪽으로 느릿느릿 흘러든다. 강이 목계를 지나고 원주를 거치면 비로소 경기도 땅으로 접어드는데, 그 첫 물목은 여주다. 기름진 충적평야가 발달한 여주 땅은 강으로 인해 늘 풍요로웠고, 그로 인해 사람살이의 역사 또한 오래되고 깊다. 여주에서 강은 본이름 대신 여강으로 불린다.   






여강, 그 잔잔한 물목의 풍요로움


 신륵사 강월헌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한강의 모습은 시린 바람만큼이나 청명하다. 미동도 없이 유유히 흐르는 널찍한 강 풍광, 기름진 땅과 세월을 머금은 유적들. 여주의 여정은 강이 내려준 혜택만큼이나 풍요로우며 서정으로 가득하다. 고려 말의 학자 이색은 그의 시에서 여주를 일컬어 “들이 펀펀하고 산이 멀다.” 라고 쓰고 있다. 실제로는 산지가 50%가량 되지만 대부분이 야트막한데다 군의 외곽 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들이 넓고 흙이 기름져 인근의 이천과 함께 쌀의 고장, 도자기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여주는 대동강 언저리의 평양과 소양강 언저리의 춘천과 더불어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으로 소개되고 있다. 풍요로운 지리적 여건을 바탕으로 이 곳은 일찍이 청동기 시대부터 농경문화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역사가 깊다보니 그만큼 사람들이 살다 간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고 터가 좋아서인지 유서 깊은 유적지가 즐비하다. 천서리의 파사산성은 삼국시대 초기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드물게 강을 끼고 앉은 고찰 신륵사와 상교리의 고즈넉한 옛 절터 고달사지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또한 이 곳은 세종대왕과 효종, 두 임금의 무덤이 자리한 명당터이며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신륵사 다층전탑 뒤 정자에 오르면 남한강의 풍광을 시원스레 마주할 수 있다.


남한강 강변사찰, 신륵사


 대부분의 고찰들이 산자락에 있는데 반해 신륵사는 강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신륵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고려말의 추앙받던 고승, 나옹선사의 입적으로 유명해졌다. 고려 말 공민왕 시절, 홍건적의 침입이 극에 달했다. 오죽하면 왕이 홍건적을 피해 남쪽으로 천도를 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때 나옹선사는 황해도 땅의 작은 암자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곳 역시 홍건적이 난입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모두 술렁거렸지만 나옹선사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설법과 참선에만 전념한다. 홀로 앉아 절집을 지키던 나옹선사. 결국 홍건적은 이에 감명 받아 부처에게 향까지 사르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신륵사는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지만 현종 무렵부터 다시 복원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이 여주에 들어서며 한 때는 왕실의 원찰 노릇도 했다. 화강암이 주 재질인 일반 석탑과는 달리 벽돌로 쌓아올린 다층전탑을 비롯해 일곱 점의 국가지정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한편, 이 곳 신륵사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고려 고종 때, 주변 마을에 용마가 자주 출몰해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이 말이 어찌나 사납고 거칠던지 아무도 다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신륵사 인당대사라는 스님이 용마의 머리에 굴레를 씌우자 비로소 말이 얌전해졌다고 한다. 신륵사의 륵(勒)자가 바로 말을 통제하고 다스린다는 뜻이니 어쨌든 신륵사가 말과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신륵사의 문화재/ 신륵사 조사당(보물180호), 보제존자 석종(보물228호), 신륵사 다층전탑(보물226호)
신륵사의 문화재/ 극락보전(경기 유형문화재128호), 대장각기비(보물230호), 보제존자앞 석등(보물231호), 보제존자 석종비(보물229호), 신륵사다층석탑(보물225호)





파사산성(사적251호)과 남한강


남한강 수운의 길목이었던 이포나루와 파사산성


 여주읍내에서 남한강을 따라 30분쯤 가다보면 이포대교가 나오는데 이곳은 천서리다. 한때 이포나루로 유명했던 곳이다. 지금은 육로로 길들이 잘 뚫려 있지만 예전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대신 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했는데 배가 중요한 교통, 운반 수단이었다. 조선시대 때까지 이포나루는 한양과 강원도를 잇는 번화한 나루터였다. 강원도의 물산들이 이포나루를 거쳐 한양으로 흘러들었고 한양의 물산들 또한 이포를 거쳐 강원도로 거슬러갔다. 나루터에는 수많은 민초들의 애환과 이야기 거리들이 전해져오는데 이포나루에는 비운의 왕 단종의 애환도 묻혀져 있다. 세조2년(1456) 폐위 된 단종은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한양 광진나루에서 뱃길을 따라 내려온 단종은 이곳 이포나루에서 잠시 내려 눈물을 뿌렸다고 한다. 그때 단종이 마셨던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이라는 우물이 인근의 대신면에 자리하고 있다. 이포나루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자락에 쌓아올린 산성이 보인다. 파사산성이다. 해발높이가 230m 밖에 안 되지만 남한강과 인근 마을들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요지이다. 파사산이라는 이름이 생긴 연유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먼 옛날 이곳에 파사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의 5대왕인 파사왕 때 성을 쌓아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다. 산성은 능선을 따라 1.8km의 둘레로 쌓여있다. 산성 위에 오르면 너른 여주의 들판과 남한강 물길과 마을들의 모습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파사산성은 사적215호로 지정되어 있다.    



파사산은 해발높이가 230m 밖에 안 되지만, 남한강과 여주의 풍광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드넓은 절터에서도 고즈넉한 숲 속에 자리한 고달사지 부도.  최고의 부도와 독대하는 순간..


여주의 옛 절터, 고달사지


 지금은 폐사지가 되어버린 고달사는 신라시대에 세워져 한때 사방 30리가 모두 절 땅이었을 정도로 번성했던 사찰이다. 이 사찰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전해오는 기록은 없지만, 이 곳에는 매우 늠름하고 잘생긴 부도가 있다. 국보4호로 지정된 고달사지부도이다. 부도란 고승들이 입적한 후, 그의 사리를 보관해 놓는 탑형태의 석조물이다. 부도역시 각각의 시대마다 유행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형태나 규모가 다 다른데, 그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부도탑 중 하나가 바로 고달사지 부도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이 부도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조각이 섬세하고 특히, 큼지막한 지대석을 장식한 용조각은 금새 튀어나올 듯 힘차고 용맹스럽다. 같은 고달사지 안에 있으면서, 나중에 만든 원종대사 부도와 비교해보면 그 장대함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너른 산자락과 들녘으로 펼쳐진 황량해 보이는 폐사지. 고달사지에서 세월을 음미해볼 수 있다면 비로소 남한강 여정의 운치를 제대로 마음에 담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고달사지에는 고달사지 부도 이외에도 원종대사부도(보물7호), 부도비(보물6호), 석불대좌(보물8호) 가 자리하고 있다.  


고달사지 부도의 조각들.  지붕돌의 귀꽂이는 우아한 상승곡선을 보이고, 비천상은 금새라도 날아갈 듯하며, 지대석의 용은 호방한 표정으로 부도를 짊어지고 있다.



좌로부터/ 원종대사혜진탑(보물7호),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및 이수(보물6호), 고달사지석불대좌(보물8호)




두 임금이 묻힌, 영녕릉과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의 생가


 영릉은 세종대왕과 그의 왕비인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며 녕릉은 효종임금 내외가 묻혀있다. 발음상 영녕릉으로 부르지만 한자로는 둘 다 영릉이다. 조선시대 두 임금이 함께 묻힌 이 곳은 두말할 나위 없이 천하의 명당터로 전해진다. 영릉이 이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역사가 100년이나 연장되었다는 말이 지관들 사이에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여러 왕릉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당터라고 한다. 대부분 단조롭고 비슷비슷한 것이 왕릉이지만 이 곳을 돌아볼 땐 조붓한 길을 따라 봉분 주변까지 올라보자. 문인석이나 무인석 같은 왕을 위해 장식된 석상들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전시된 세종전은 그의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비록 모조품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선구적인 발명품들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간결한 조선의 여느 왕릉에 비해 볼 것이 많다. 영녕릉은 사적 195호로 지정되어있으며 해마다 한글날을 전후해 세종대왕 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명석한 여장부였지만 불운했던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의 생가가 여주에 있다. 이 곳은 고종황제(1863~1907)의 비 명성황후 민씨(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으로 1687년(숙종13)에 건립되었다.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뿐인데 1975년과 1976년에 한번 중수하였다가 1996년에 다시 수리하면서 행랑와 사랑, 별당 등을 함께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명성황후의 옛집과 주변은 여주여행의 또하나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깔끔하게 꾸며진 전시관에서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조경이 잘되어있어 공원의 정취도 지니고 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와 여주 시내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이정표가 나온다. 명성황후 생가는 1973년 경기 유형문화재 46호로 지정되어있다.


세종대왕이 안장된 영릉,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세종대왕 영정과 금속활자


여주읍 능현리에 자리한 명성황후 생가(경기도 유형문화재 46호)




여주 일정 Tip


개략적인 답사일정 

명성황후생가 - 고달사지 - 신륵사 - 영녕릉  - 파사산성


 - 첫 일정을 명성황후 생가로 잡은 것은 영동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면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자리해있기 때문이다.  고달사지 가는 길에 신륵사를 지나가지만, 북쪽 끝에 있는 고달사지를 먼저 보고 신륵사를 들르는 것이 동선상 효율적이다.

-  신륵사 강건너 편의 여주읍 창리에 두기의 보물이 있다. 여주 창리 삼층석탑(보물91호) 와 하리 삼층석탑(보물92호) 이다.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  파사산성에서 이포보를 건너면 계신리 마애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98호)가 있다. 고려초기의 마애불이다.

-  파사산성 초입의 천서리에는 막국수 집이 많다. 그 중 봉진막국수 집이 가장 오래되고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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