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H Nov 17. 2020

삶의 무게에 지친 그대에게 바치는 편지

포기할 줄 아는 용기

대학가에서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 말이 있다. 학교의 모든 가로수가 벚꽃 나무라 나름 지역에서 유명한 벚꽃 명소가 되어버린 학교, 허나 학생들은 시험 준비에 정작 이를 즐기지 못한다. 그리고 벚꽃이 질 무렵, 대학의 학생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시험이 일찍 끝나 떨어지는 벚꽃을 감상하며 자유와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학생들과, 밤을 새우려다 밀려드는 잠을 참지 못하고 2~3시간 쪽잠을 자고 두 눈에 피로를 가득 안고 다시 카페로 출근하고 있는 시험이 남은 학생들.


그리고 4학년이 되면서 쌓인 짬과 늘어난 언변으로 학기 초 수강신청 구걸에 성공했던 나는 일찍 히 중간고사를 끝내고,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대학생의 권리를 그 누구보다 열심히 누리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전날 저녁 단골 술집의 마감 시간까지 술에 절은 후 아침이 생각날 때까지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해장을 한 후 기숙사에서 잠에 들었다.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잘 생각이었고, 그 누구도 이 잠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이 꿈같은 휴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잠결에도 누군가 자꾸 방에 들락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결국 누군가 방에 들어와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이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어제 같이 밤새 게임을 하고 해장을 했던, 아직 나와 같이 자고 있어야 할 친구 A 였다. 지금 몇 신데 벌써 깨우냐며 핸드폰을 봤다. 부재중 통화가 수십 통이 쌓여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단톡 방을 보니 대학원 옥상에서 누군가 떨어졌고, 같은 단톡 방에 있던 친구 B가 이를 최초 목격해 경찰에 신고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게 누구였는지 묻는 질문이 벌써 수시간 전인데, 친구 B가 답변을 하지 않고 있었고 그 이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있던 찰나, 옆에서 내가 잠이 깰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던 친구 A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단톡 방 봤어?"(A)/ "어 이게 뭔 일 이래. 넌 누군지 아냐?" (나) / "확실하진 않는데 아마 C 같다고 하더라"(A)

   

친구에게 개소리하지 말라며 화를 낸 후 바로 B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B는 아직 다른 친구들에게 정확히 말은 안했지만 자신이 발견한 친구가 C가 맞다고 확인해 줬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헛구역질이 나왔다. 동시에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차라리 이 메스꺼움과 멍함이 지속되기를 빌었다. 하지만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빨리 맑아지기 시작했고,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이상하게도 슬픔의 감정은 없었다. C가 그랬을 리 없다는 확신과 함께 '만약에, 만에 하나 C가 그랬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왜?'라는 의문, 그리고 C가 정말 힘들어서 그런 선택을 했다면 왜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나에게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을까 하는 배신감, 또 난 왜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가에 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


C는 내가 이 대학에 와서 가장 처음 만나고 친해졌던 동생이자 친구였다.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2인 1실 기숙사의 랜덤 룸메이트로 배정받으며 알게 된 C는, 과학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 졸업하고 대학에서도 좋은 성적을 유지한, 그 무엇보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보단 남에게 맞추는 것을 선호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았던 친구였다. C의 성격 덕에 빠르게 친해진 나는 이후 C와 약 2년간 룸메이트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며 이를 인정받아 외주로 그림을 그려주며 용돈을 벌고 있다는 것과 가정 상황이 좋지 못해 빨리 졸업하고 본인이 홀로 계신 어머니와 동생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왜 그런 고민을 이렇게 늦게 이야기했냐며 서운해하던 나에게 C는'형도 남이 보기엔 힘든 가정 상황이 형에겐 너무 오래전부터 당연한 사실이라 마치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하는 고민과 비슷하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나도 너무 어릴 적부터 받아들여온 사실이라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살짝 부담은 되지만 그렇다고 큰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라고 답을 했다. 당장 현재의 나도 납득할만한 답을 듣고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고, 2년이 지난 후 룸메이트가 바뀌면서 가끔 야식을 같이 시켜먹으며 수다 떨거나 지나가면서 만나면 가볍게 안부를 물으며 웃으며 인사하는 사이가 됐다.


그 일이 며칠 전 까지만 해도 그랬다. 시험이 일찍 끝난 나는 마찬가지로 시험이 끝난 C를 만나 시험은 잘 봤냐며 안부를 물었고, 적당히 잘 본 것 같다는 답과 함께 요새 대학원 진학을 위해 인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진로를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 전과를 하고 게임에 빠져 한 학기 휴학을 하고 돌아왔던 필자와 달리, 박사과정을 위해 최단 루트를 밟아 나가는 C를 보며 필자는 진로가 확실해 부럽다 전했고 C는 웃어넘겼다. 그게 내가 본 C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3일 후 C는 C의 룸메이트 책상에 얼마 전 빌린 돈 몇천 원을 올려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이 있은지 벌써 4년이 넘게 지났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먹먹한 감정이 올라온다. 무엇이 석박 통합 과정 입학을 앞두고 있던, 앞날이 창창하던 C를 무너지게 했을까. 평생 내가 그의 감정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겠지만, 감히 추측컨데 그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고 이를 내려놓기엔 너무 착해서라 생각한다. 나름 날고 긴다 자부하는 학생들이 모인 곳에서도 생물학에서 두각을 보였던 C는, 생물이 너무 힘들고 싫던데 너는 어떻게 좋아하냐는 나의 질문에 '생물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잘해서 하고 있는 거예요. 전 오히려 그림이 좋아요.'라는 답을 했고, '가끔은 휴학하고 그림만 그리고 싶지만, 가정 상황상 빨리 졸업을 해야 해서 그럴 수가 없어요'라며 이야기했다.


사실 우리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생각보다 힘든 상황 속에서 삶의 무게를 앉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리고 이 삶의 무게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당사자가 아니고선 그 무게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는 이도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안고 있을 수 있으며 그 사유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당사자에겐 치명적일 수 있는 형태를 띤다. 다만 인간의 뇌는 생존을 위해 후각 순응(Olfactory adaptation)과 같이 삶의 무게에 적응 하기 시작하고, '역치'값을 넘기 전까진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채 삶의 무게를 앉고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그러다 역치 값을 넘는 순간 기존에 느끼지 못했던 자극(스트레스)이 터져 나오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위의 상황이 발생하면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한다. 견디지 못할 무게를 포기하고 내려놓을지, 그 무게를 앉고 이겨낼지. 그리고 내가 지켜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번 삶의 무게를 앉고 가기 시작하면 '내가 조금 더 힘내서 이겨내지 뭐' 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만약 고생 끝에 이겨냈다면 한 단계 성장하고 나름의 성취감도 얻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해피 앤딩이 찾아올까? 삶이란 참 신기하게도 매 순간 새로운 시련이 찾아오고 다시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개인이 이겨낼 수 없는, 역치 값을 넘는 삶의 무게가 찾아온다.


태풍이 찾아와도 갈대가 부러지지 않는 이유는 반듯이 서있길 포기하고 굽힐 줄 알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태풍이 찾아왔을 때 반듯이 서있기를 고집하면 결국 부러지고 영원히 꺾이고 만다.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주변의 기대를 저버릴 용기. 이기적이라며 비난받을 용기.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욕심을 내려놓을 용기.


인간은 사회를 구성해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지만, 이 사회도 개인이 모여 구성하는 것이고 개인이 있어야 사회가 의미가 있다. 주변에서 나에게 기대하는 게 많은 상황이고,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상황인가? 당장에 내가 버틸 수 없는 한계에 직면했는데 나에게 이를 이겨내기만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들이 정말 내 '주변인'이 맞는지부터 생각해봤으면 한다. 만약 그 주변인들이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나와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행복은 나누고 아픔은 함께하는 게 진정한 가족이나 친구이다. 그들이 나의 고통을 무시한 채 내가 이겨내기만을 강요하고 있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남보다도 못한 관계라는 것을 인지하기 바란다. 그들이 진정한 내 '주변인'이라면 나의 고통을 인지한 순간 아픔을 함께하고 같이 이겨내려 할 것이다.


그들이 남이라면 이기적이라 비난할 수 있다. 그럴 땐 내 주변인을 생각하면 된다. 본인이 한계에 부딪혀 힘들어하고 있다면,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주변인의 사소한 실수에도 크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나와 앞으로 함께할 이들은 내 주변인 들이며, 남이 뭐라 비난한들 내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챙겨야 하고 비난받는걸 두려워 해선 안된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기 싫더라도 마주 보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관대하면서 동시에 유한하다. 다들 누구나 한계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유독 자기 스스로의 한계에는 관대하다. 자신이 한계에 왔다는 점을 인정하는 순간 스스로가 부정당한 기분이고, 삶의 원동력을 잃은 기분일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순간이 성장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발전은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이를 보충할 방법도 찾을 수 있다.


쉬지 않고 달려오다 벽에 부딪혔다면, 자신이 달려왔던 길을 돌아보고 잠깐 쉬어가길 바란다. 그리고 지금 마주한 벽을 다시 돌아보며, 이 벽도 이겨낼 수 있겠다 확신이 들면 멋지게 이겨내면 된다. 하지만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생각이 들면 포기해도 괜찮다. 지금 당장은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결국 조금 돌아가더라도 길은 있다.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당신은 잠시 포기하고 내려놓을 권리가 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도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잖아?'라는 말을 해보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8개월 만에 연대,과기원 합격하기(Feat.수능대박)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