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 화면을 스치듯 넘기는 손끝에서 하루의 정보가 소비되고, 성과와 결과는 언제나 ‘얼마나 빨리’ 도달했는지로 평가된다. 효율과 성공은 미덕이 되었고, 느림은 종종 무능이나 게으름의 다른 이름처럼 취급된다. 이 시대에 ‘천천히’ 읽고, ‘여러 번’ 되새긴다는 말은 다소 고루하거나 비현실적인 주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빠르게 가는 것만이 옳은 길일까. 남들보다 늦어진다는 공포에 쫓기느라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 이해보다 암기, 성찰보다 요약이 앞서는 독서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가.
이 질문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나는 충청북도 증평으로 향했다. 이 작은 고장에는 조선 최고의 ‘바보’라 불렸으나 끝내 조선 최고의 ‘독서인’이자 시인으로 기억되는 인물, 백곡(栢谷) 김득신(1604~1684)의 흔적이 남아 있다. 타고난 재능보다 스스로의 아둔함을 정직한 노력으로 돌파해 낸 한 인간의 기록. 나는 오늘, 시간의 속도를 늦추고 그의 서재로 들어가기 위해 이 길 위에 섰다.
증평 군립도서관 옆에 나란히 자리한 ‘독서왕 김득신 문학관’은 과장되지 않은 단정함을 지니고 있다. 책을 펼쳐 놓은 듯한 외관은 과거의 사유와 현재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지점을 연상시킨다. 문학관으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조용했고, 겨울의 기운을 머금은 공기 속에서 발걸음 소리마저 신중해졌다.
마당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북이를 닮은 김득신 캐릭터와 인자한 표정의 동상이었다. 빠름과는 거리가 먼 존재, 그러나 묵묵히 제 길을 가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그 앞에 서자, 마치 이곳이 경쟁의 세계와 잠시 단절된 별도의 시간대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시실 입구에 새겨진 그의 문장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이 짧은 문장은 조급해하던 나의 마음을 정확히 겨냥했다. 동시에 성과와 비교에 지친 현대인들의 가슴에도 깊이 파고드는 문장이었다. 김득신의 목소리는 400년의 시간을 건너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문학관 내부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김득신의 독서 기록인 <독수기(讀數記)>가 전시된 공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읽은 책과 그 횟수를 한 치의 허위도 없이 기록했다. 단 한 번의 독서로는 부족했던 이해를, 그는 숫자로 증명했다.
1만 번 이상 읽은 책이 36권.
그중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백이 열 전〉은 무려 11만 3천 번.
숫자로 볼 때는 감각이 마비된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냈을 수많은 밤을 떠올리는 순간, 이 숫자는 추상이 아니라 육체적인 노동으로 다가온다. 11만 번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매번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용기이며,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을 끝내 이해하고자 했던 한 인간의 처절한 수행이다.
그의 서재 이름 ‘억만재(億萬齋)’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읽는다는 행위가 곧 자기 자신을 깎아내는 일이었고, 글은 그렇게 그의 뼈와 살이 되었다. 전시실 한 편의 필사 체험 공간에서 나 역시 붓을 들고 그의 문장을 따라 써 내려갔다. 먹이 종이에 스며드는 속도는 느렸고, 그 느림 속에서 나는 비로소 한 문장을 ‘쓴다’는 감각을 되찾고 있었다.
김득신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위대함 뒤에는 또 다른 위대한 존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아버지 김치(金緻)다. 기록에 따르면 김득신은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은 뒤 기억력과 이해력이 크게 떨어졌다고 한다. 열 살이 넘어서야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그는 아들의 느림을 결핍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는 반드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다”라고 말하며 아들의 손을 놓지 않았다. 다그침 대신 기다림을, 비교 대신 신뢰를 건넸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를 끝까지 믿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그 믿음이 한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김득신의 삶은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59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당대 문장가들로부터 찬사를 받기까지 그를 지탱한 힘은 독서의 집념과 더불어 흔들리지 않는 부성의 신뢰였을 것이다.
김득신은 단순히 ‘많이 읽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독서는 언제나 문학으로 귀결되었다. 수만 번의 읽기를 통해 체화된 언어는 마침내 그의 시 속에서 새로운 숨을 쉬었다. 택당 이식 등 당대의 석학들은 그의 시를 두고 “당나라 시의 경지에 올랐다”라고 평했다.
문학관 곳곳에 전시된 그의 시구들은 화려한 수사 대신 투박한 진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투박함은 결코 얕지 않았다. 오히려 수없이 걸러진 언어만이 지닐 수 있는 밀도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책상 앞에서만 태어난 문장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하며 몸으로 익힌 문장이었다.
나는 문득 오늘날의 글쓰기를 떠올렸다. 너무 빨리 쓰고, 너무 쉽게 지우며, 너무 서둘러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김득신의 문학은 우리에게 묻는다.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과연 몇 번이나 되돌아가 본 적이 있는가.
기행을 마치고 문학관을 나서자, 보강천 미루나무 숲 위로 저녁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하루의 끝자락에서 나는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단순한 답사가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얼마나 빨리’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재능이 있는가’보다 ‘멈추지 않는가’를 묻는 질문 말이다.
에세이의 분량을 채우기 위해 조급해하던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김득신은 11만 번을 읽으면서도 조급해하지 않았는데, 나는 몇 장의 글 앞에서 결과만을 먼저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마음속에 작은 ‘억만재’를 짓기로 했다. 남들보다 늦어도 괜찮고, 재능이 부족해도 괜찮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문장과 사유 앞에서만큼은 도망치지 않겠다고. 한 번 더 읽고, 한 번 더 생각하며, 한 문장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증평의 바람이 실어다 준 김득신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힘쓰는 데 달렸을 따름이다.”
작가 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백곡 김득신(1604~1684)은 한국 역사상 가장 지독한 '노력파 독서가'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학습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꾸짖기보다 "포기하지 마라"며 격려했고, 이에 김득신은 반복적인 읽기로 부족함을 채웠습니다. 그는 책을 몇 번 읽었는지 기록하는 '독수기'를 남겼는데, 그 기록이 경이롭습니다. 사기열전(史記列傳) 무려 11만 3천 번을 읽었고 기타 고전은 1만 번 이상 읽은 책만 해도 수십 권에 달합니다.
그는 끊임없는 노력 끝에 59세라는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이식으로부터 "그대의 시가 당나라 최고 시인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극찬을 받으며 시문에서도 일가를 이뤘습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정성에 달린 것이다."
그의 묘비명에 새겨진 이 글귀는 오늘날에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문학관 소개:
충청북도 증평군에 위치한 독서왕 김득신 문학관은 조선 최고의 노력가이자 독서광이었던 백곡 김득신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문화 공간입니다.
이 문학관은 김득신의 고향인 증평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그의 '대기만성(大器晩成)'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세워졌습니다. 머리가 똑똑하지 않아도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문학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구성되어 있으며, 김득신의 삶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상설 전시실에는 김득신의 일대기와 그가 남긴 '독수기(독서 기록)', 서적, 유물 등을 전시합니다. 특히 11만 번 넘게 읽은 『사기열전』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재현했습니다.
기획전시실은 지역 예술가들의 전시나 독서 관련 특별 기획전이 열립니다. 또한 취적루 & 억만재실에는 김득신의 서재를 재현한 공간과 독서 쉼터가 마련되어 있어, 방문객들이 직접 책을 읽으며 김득신의 마음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문학관 인근에는 김득신의 묘소와 그를 테마로 한 공원, 캐릭터 동상 등이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어린이와 학생들에게는 "노력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최고의 체험 학습 명소로 꼽힙니다.
주소는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인삼로 23
관람 시간: 09:00 ~ 18: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연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