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 조명희 문학관

by 노준성

문학에도 미로 같은 고난이 앞을 가로막은 험난한 길을 걷는 분들이 많다 . 화려한 도심의 대형 서점가에서 만나는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낡은 교과서의 각주나 오래된 문학사의 갈피 속에 숨어 있는 이름들. 그 이름들은 쉽게 불리지 않고, 자주 호명되지 않으며, 시대의 편의에 따라 지워졌다가 다시 불려 나오곤 한다. 내게 ‘조명희’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그렇게 존재해온 별이었다. 분명 빛나고 있었으나, 누구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별, 그런 분이었다.
카프(KAPF)의 선구자, 소설 〈낙동강〉의 작가, 그리고 소련으로 망명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지식인. 그의 삶을 요약하는 몇 개의 문장은 늘 차갑고 단정했다. 그러나 그 문장들 사이에는 언제나 말해지지 않은 질문들이 남아 있었다. 왜 그는 그토록 먼 길을 떠나야 했는가. 왜 그의 문학은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금기가 되었는가.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을 안고 나는 그가 태어난 땅, 충청북도 진천으로 향했다. 문학기행이란 결국 작가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가 남긴 침묵의 무게를 체감하는 일이기도 하다. 조명희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의 재능을 감상하는 일이 아니라, 식민지라는 시대가 한 지식인에게 어떤 선택을 강요했는지를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천은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는 말처럼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완만한 들판, 낮은 산, 유순한 물길. 그러나 그 온화한 땅에서 태어난 한 문학가가 결국 조국을 떠나 중앙아시아의 낯선 땅에서 총성 속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차창 밖으로 스치는 평화로운 풍경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게 다가왔다. 이 평온함은 어쩌면 역사가 잠시 숨을 고른 자리인지도 모른다.


진천읍내를 가로지르는 백곡천을 따라 걷는다. 겨울의 물빛은 투명했고, 강둑의 갈대는 바람에 몸을 낮추고 있었다. 이 조용한 물길 곁에 문학관이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물은 늘 흘러가지만, 기억은 그 곁에 머무른다. 포석 조명희 문학관은 그렇게 흐름과 기억의 경계에 서 있었다.
제1회 생거진천 건축상을 받았다는 건물은 과시적이지 않으면서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유리와 콘크리트, 목재가 조화를 이루는 외관은 ‘문학관’보다는 ‘문학의 전당’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었다. 건물 앞에는 인자하면서도 강단 있는 표정의 조명희 동상이 서 있다. 고개를 약간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 그것은 과거를 회상하는 눈빛이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향한 응시처럼 보였다.
문학관 내부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그의 초기 시집 <봄 잔디밭 위에>의 이미지였다. 1923년, 식민지 조선의 하늘 아래서 이토록 맑은 서정을 노래했던 청년 조명희. 봄, 잔디, 햇살. 그 단어들은 훗날 ‘혁명’, ‘계급’, ‘망명’ 같은 단어들에 가려져 잊히곤 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처음부터 투쟁으로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세계를 사랑했고, 그 사랑이 배반당했을 때 펜을 무기로 바꾸었다.
전시실을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그의 문학은 개인의 서정을 넘어 민족의 고통과 시대의 모순이라는 거대한 바다로 흘러간다. 초기 시편의 맑음은 점차 균열을 일으키고, 그 균열 속에서 현실 인식이 고개를 든다. 조명희의 문학적 전환은 갑작스러운 변신이 아니라, 세계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윤리적 선택이었다.

전시실의 중심부에서 나는 그의 대표작 〈낙동강〉과 마주한다. 1927년 발표된 이 소설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리얼리즘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평가’라는 말로는 이 작품이 품은 절박함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낙동강〉은 하나의 소설이라기보다, 시대가 한 작가에게 강요한 증언에 가깝다.
사회주의 운동가 박성운의 죽음, 그를 떠나보내는 연인 로사의 슬픔, 그리고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강은 배경이 아니라 주체다. 조명희에게 강은 역사의 은유이자 민중의 생명선이었다. 강은 수탈당하고, 막히고, 범람하지만 끝내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전시된 원고와 자료를 읽으며 나는 박성운의 목소리를 듣는 듯했다. “이 강물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것은 단순한 지리적 질문이 아니었다. 일제의 수탈 아래 신음하는 농민들의 절규이자,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지식인의 고뇌였다. 조명희는 펜을 휘두르는 검객처럼 날카로운 문장으로 식민지 조선의 병폐를 해부했다. 감상적 동정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에 대한 고발. 그의 문장은 차갑고 단정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뜨거운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이 소설 앞에서 나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문학은 세계를 위로하는가, 아니면 고발하는가. 조명희에게 이 질문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위로가 거짓이 되는 시대에는 고발이 곧 연민이었기 때문이다.

문학관의 후반부는 조명희 생애에서 가장 가슴 아픈 구간, ‘망명’의 기록들로 채워져 있다. 1928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극에 달하자 그는 압록강을 건너 소련으로 향했다. 망명은 도피가 아니라 결단이었다. 조국에 남아 침묵하느니, 떠나서라도 말하겠다는 선택.
고국을 떠나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전시된 편지와 기록들 앞에서 나는 그가 밤마다 반복했을 질문을 상상해본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가. 나는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가. 그러나 망명자의 질문에는 언제나 답이 없다. 오직 걸어갈 뿐이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거듭났다. 고려인 신문 <선봉>의 편집을 맡고, 동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문학을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웠다. 망명지에서 그는 다시 ‘문학의 공공성’을 실천했다. 문학은 개인의 명성이 아니라 공동체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이곳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전시된 빛바랜 사진 속 조명희는 털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아마도 진천의 백곡천이나, 그가 문학으로 품었던 낙동강이 있었을 것이다. 고향은 떠난 장소가 아니라, 끝내 도착하지 못한 질문으로 남는다.
그러나 역사는 그에게 끝내 자비를 허락하지 않았다.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이라는 광풍 속에서 그는 ‘일본 간첩’이라는 황당한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이듬해, 그는 총살당했다. 조국을 위해 망명했던 투사가 망명지에서 간첩으로 몰려 죽어야 했던 이 비극적인 결말 앞에서, 관람객들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한다. 이곳에서는 설명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문학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백곡천 산책로와 연결된 ‘포석 조명희 거리’가 이어진다. 길가에 세워진 시비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걷는다. 시는 박물관 안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의 길목에서 읽힐 때 비로소 살아난다.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그의 이름은 남한 땅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금기였다. 분단과 이념의 시대는 그의 문학을 온전히 읽을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고향의 볕 좋은 길목에서 주민들과 함께 숨 쉬고 있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노인들이 산책을 하며 시비 앞에 잠시 멈춰 선다. 문학은 그렇게 다시 공동체의 언어로 돌아온다.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고 한다. 만 리 타국에서 동포들을 껴안았던 그의 따뜻한 가슴이 그곳 사람들에게도 전해진 것이리라. 진천의 포석 조명희 문학관은 단순히 과거를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단절되었던 우리 문학사의 허리를 잇고 유랑하던 고려인들의 넋을 달래는 영혼의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다시 한번 소설 〈낙동강〉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박성운의 시신을 실은 배가 강물을 따라 흘러가고, 로사는 그 뒤를 따르며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흐름. 그것이 조명희 문학의 핵심이다.
그의 문장은 국경을 넘어 고려인의 마을로 흘러갔고, 이념의 장벽을 넘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포석 조명희 문학관 기행은 나에게 ‘실천하는 지식인’의 무게를 가르쳐주었다. 글이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시대를 증언하는 윤리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진실한 문학은 결국 살아남는다는 것을.
진천의 맑은 물줄기가 언젠가 머나먼 타슈켄트의 어느 골목까지 닿기를, 그리고 그 흐름 위에서 또 다른 이름 없는 별들이 다시 발견되기를 바라며, 나는 문학관의 마지막 조명을 뒤로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내 마음속 하늘에는 ‘조명희’라는 이름의 별이,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빛으로 남아 있다.



"낙동강아! 너는 말하라. 네 품안에서 자란 아들딸이 어디로 갔느냐? 너는 말이 없구나. 다만 굽이쳐 흐를 뿐이로구나."


"사람은 제각기 제 길을 가야 한다. 비록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믿음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야 한다.“

- 낙동강 중


"문학은 배부른 자의 유희가 아니라, 굶주린 자의 울부짖음이며 억눌린 자의 외침이어야 한다."


"조국은 잃었어도 넋은 잃지 않았으며, 땅은 빼앗겼어도 꿈은 빼앗기지 않았다.“


- 소련 망명시절 어록 중




작가 소개:

포석(抱石) 조명희(1894~1938)는 일제강점기 한국 근대 문학의 지평을 넓힌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입니다. 충북 진천 출생인 그는 초기에는 낭만주의적 경향의 시와 희곡을 발표했으나, 점차 식민지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는 리얼리즘 문학으로 나아갔습니다.

대표작 <낙동강> 1927년 발표된 이 소설은 한국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습니다. 식민지 수탈에 맞선 농민들의 투쟁과 민족적 저항 의식을 강렬하게 형상화했습니다.

희곡 <김영일의 사>: 한국 근대 희곡사의 초기 주요작으로, 지식인의 고뇌와 비극적 삶을 다루었습니다.

192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그는 현지 고려인 사회에서 문학 활동을 이어가며 카프(KAPF) 문학의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 간첩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조명희는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민중의 생명력을 펜 끝에 담아냈으며, 그의 문학은 오늘날 민족 문학의 토대를 닦은 소중한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문학관 소개:

충북 진천에 위치한 포석조명희문학관은 한국 근대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인 조명희 선생의 생애와 문학적 업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2014년 작가의 고향인 진천군 백곡천 인근에 개관하였으며, 그의 치열했던 삶과 문학 정신을 만날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입니다. 작가의 연보, 육필 원고 복사본, 생전 사진 등을 전시하며, 초기 낭만주의 희곡부터 후기 리얼리즘 소설까지의 변화 과정을 한눈에 보여줍니다. 또 낯선 타국에서 고려인들의 등불이 되었던 활동상과 비극적인 최후를 다룬 자료들이 전시되어 깊은 울림을 줍니다.

문학관 주변은 포석공원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작가가 사랑했던 고향의 정취를 느끼며 사색에 잠기기 좋습니다. 매년 열리는 '포석문학제'는 그의 문학적 성취를 기리는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을 넘어,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고뇌와 민족적 저항 의식을 오늘날의 세대에게 전달하는 교육의 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위치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포석길 37-14 (읍내리 201)이고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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