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민은 누가 알아주나요
국가교육과정은 참으로 명백하다.
고시된 교육과정은 말 그대로 '고시된' 것이기 때문에, 공교육의 교사는 교육과정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 교육부가 제시하는 교육과정의 인간상 - 교과교육의 목표를 따라서, 정해진 단원과 정해진 성취기준에 의거해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잘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
말이야 쉽지.
그냥 내용요소만 주구장창 가르친다고 해서, 역사교육목표가 추구하는 인간상을 길러낼 수 없고, 교육목표가 추구하는 인간상을 길러낼 순 없다. 프랑스혁명이 언제 일어났고, 청교도 혁명에서 누가 등장했고, 미국은 언제 독립했고, 조선이 건국된 연도가 무엇인지를 줄줄이 왼다고 역사적 사고력이 뛰어나거나 자주적인 사람,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건 아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지.
그러려면 교사는 수업을 재구성해야 한다.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적절히 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쳐내는 것은 물론.
내용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과서와 성취기준을 가지고 어떻게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수행능력'을 길러낼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서 말이다.
그러나 성취기준은 원칙적으로 재구성할 수 없다. '고시된' 교육과정이기 때문에.
(이건 내 뇌피셜 아니고, 대학원에서 교육과정 수업하시는 교수님이 하신 말씀)
다만, 문서에 따르면 "학교에서는 수업 및 평가 상황에서 의거해서, '평가준거 성취기준'을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교사로서 우리는 '평가준거 성취기준'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교육과정 성취기준은 건드릴 수 없다. (한마디로 내용 쳐낼 수 없다는 소리다)
" 평가준거 성취기준은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확인하기 위한 다양한 평가를 실시할 때 평가의 준거로 활용할 수 있다. .... 본 연구에서 개발한 평가기준은 가능한 한 모든 학교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수준에서 개발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학교 현장의 상황에 비추어 재구성하거나 재개발하여 사용할 수 있다. 다만 그 경우에도 반드시 교육과정 성취기준과 본 연구에서 개발한 평가준거 성취기준에 근거하여 재구성하여야 한다." (2015 개정 교육과정 평가기준- 중학교 역사, 고등학교 한국사)
그랬다. 매번 성취기준을 재구성할 수 있다, 있다, 했는데.
옆에 평가준거 성취기준 똑같이 서술해 놓은 이유는 도대체 뭔가 했더니. 내가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평가준거 성취기준'이었던 것!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는 또 있다.
문서에서는 성취기준을 "학생들이 교과를 통해 배워야 할 내용과 이를 통해 수업 후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능력을 결합하여 나타낸 수업할동의 기준"(중학교 교육과정(교육부 고시 제2018-162호))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역사과 교육과정의 성취기준이 과연 그러한가. 에 대한 의문이 하나.
[9역04-01] 유럽과 아메리카의 시민 혁명과 국민 국가 형성과정을 이해한다.
[9역10-02] 사림 세력의 성장 과정과 사림 세력의 집권에 따른 정치 변화 내용을 이해한다.
대부분이 다 '이해한다'로 끝나는데, 저 안에 있는 내용 자체가 매우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메리카의 시민 혁명이면 영국 청교도혁명, 명예혁명, 미국 독립, 남북전쟁, 미국의 발전과 서부개척, 프랑스혁명, 7월혁명과 2월 혁명, 빈 체제, 나폴레옹, 독일 통일, 이탈리아 통일이 다 들어간다) 뭘 얼마나 이해하기를 원하는지, 이해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고 있지도 않다. '기준'이라고 보기에 매우 문제가 있는 것뿐만 아니라, 기대하는 수행능력은 안중에도 없고 그냥 '내용요소'만 들어 있을 뿐이다.
지식만 가르치겠다고 성취기준에 대놓고 명시되어 있는데, 역사교과 역량도 길러야 한다고 앞에다 써 놓으면, 교사는 어떻게 하란 소립니까. 성취기준은 손댈 수 없다며.
평가준거 성취기준의 경우에도 "평가 활동에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도록 교육과정 성취기준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써 있지만, 발표된 평가준거 성취기준은 교육과정 성취기준과 대부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동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췌 무엇이 재구성하고 구체화한 것인지요? 필요한 경우 재구성할 수 있다면, 재구성하지 않아도 쓸 수 있을 정도로는 구체화를 해 주어야 교사들이 참고를 하든 말든, 재구성을 하든 말든 하지요. 아니, 다 아니어도 되니까 딱 예시 한 두개만이라도....
아래가 평가기준 문서의 일부분이다. 대부분의 성취기준과 평가준거 성취기준은 이러하다. 그 옆의 평가기준(성취수준이겠지?)도 상, 중, 하가 명백하게 구별되지 않는다(고 교수님이 말씀해 주셨다).
어제 교육과정 수업에서 발제를 하면서. 궁금한 것을 교수님께 여쭤보고 나서.
그동안 나의 의구심(애초부터 성취기준이 제대로 설정된 것인가)이 확신이 되고서는 답답함이 배가 되었다.
그래. 성취기준 재구성한다고 매번 끙끙대고 있었는데, 이게 힘든 이유가 있었던 거다.
제발. 다음 교육과정은 제발..... ㅠㅠ
조금만 더 낫게 바꿔주세요 제발.....
교육과정 문서 취지랑 아귀만이라도 좀 맞아야지.
나만 고민하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 수업 다 잘하자고 이러는 건데.
역사교육 공부하시는 분들도, 제발 교육학 경시하거나 멀리하지 말고 좀 같이 봤으면 좋겠다. 현장에 있다 보면 교육학 전혀 쓸데없는 학문 아니고, 교수학습과정에서나 교육평가, 교육공학, 교육심리 이런 분야들 진짜 충분히 유의미하고 공부할 가치가 있는 학문이다.
나라도 이번 학기에 열심히 듣자. ㅠㅠ
수업을 재구성한다는 것, 평가한다는 것, 평가란 무엇이고 교육과정을 개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번 학기에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