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40

40세 기념 여행

이라고 명명한 삿포로 회사연수

by 짱구아빠

와이프와 이런 얘기를 한 적 있다. 40세가 되면 각자 기념여행을 보내주자. 짱구는 다른 한 명이 보고.


“그래서 오빠는 어디로 갈건데?”

“생각 안해봤는데, 파리나 스페인 이비자?

“음 오빠는 일본 후지산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어때?”

“….”


물론 현실적으로 그렇게 장기 여행을 떠날수 없을테니 농담 섞어가며 얘기했던거다(하지만 그녀는 내년에 같이 갈 여행 친구도 이미 정한 듯)


그런데 본의아니게 회사 연수 추첨에서 무려 3등으로 뽑히는 행운으로 지금 난 삿포로에 와있다. 출근 안하면서 회사 돈으로 일본이라니!! 무엇보다 하루동안 자유일정도 주어진다니!!!! 그래서 나는 이걸 40세 기념 여행으로 퉁치기로 했다.


그럼 근 2년만에 브런치에 들어온 이유는? 이런 자유시간을 너무 오랜만에 가져서일까, 머리속에 폭포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을 남겨두고 싶었다. 이런 흔적들이 나중에 누군가에게,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서프라이즈가 될지 모르니까.


일단 시간순으로, 그리고 떠오르는대로 뱉어보겠다.




1. 나는 미술관의 그림이 아니라 미술관의 공간을 더 좋아하는데, 훗카이도립근대미술관은 이름만 모던아트(Modern Art)이지 실제로는 옛스러운 2층 건물이었다. 화장실 타일 같은 바닥 색깔, 계단에는 빨간 양탄자, 네모 반듯한 중앙 홀.


그런데 이름과 달라서 오히려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다. 현대미술관이라면 으레 예상할 수 있는 모습, 예를 들면 불규칙적이고 굴곡진 선형, 도회적인 조형미, 요상한 부호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구청이나 학교강당같은 평범함이 편안함이 되고 종국에는 비범해보이는 지경까지 이르게되자, 그 공간 자체가 특별해지고 홀리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짱구의 태명(버들이)으로 지을만큼 우리가 애정하는 바로 그 버드나무가 미술관 정문에 있었던 것은 덤.

그렇게 자유 일정의 하루는 시작부터 충만했다.



1. 일본의 고령화와 장인 정신이 결합하여 노인들이 자기 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빈번하게 접하였는데, 그게 묘한 위안 또는 안정감을 주었다. 넌 임마 아직 새파랗게 젊은게!! 아직 한참 남은게!! 뭐가 걱정이여!! 라고 온몸으로 얘기하는 듯.


점심때 찾아간 라멘집 주인 할아버지는 머리에 두건 찍 둘러쓰고 말없이 요리했다. 브레이크타임 임박해서 그런지 주변 청소를 시작하셨는데, 이미 온갖 기스로 가득해서 더이상 깨끗해질거 같지 않은 판때기를 열심히도 닦으셨다. 내가 나갈때는 쳐다보지도 않고 예상보다 젊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인사해주셨다.


미술관에서 만난 그림은, 80세가 넘은 작가 본인의 자화상이었다. 작가는 쨍한 살구색 옷과 짙은 갈색의 모자를 스타일리시하게 입었다. 빨간 벨트를 매고, 주황색 팔레트를 들었다. 세월이 차곡차곡 쌓여 바짝 굽어버린 등을 감출순 없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노란 붓칠을 계속 한다.


결국 내가 느끼는 감정은 두 가지. 나이가 들어도 묵묵히 자기 길 걷는 사람에게 느끼는 일종의 '존경심', 더 나아가 나도 전혀 늦지 않았다는데서 느끼는 '안심'이다. 사실 후자의 감정이 더 크다. 인생은 마지막까지 가봐야 아는 거고 그 전까지는 일희일비할게 아니라는 것을 삶으로 증명할 증인들이기에, 그들에게 마음이 가는건 어쩔수가 없다.

테시카가라멘 요코쵸점 주인장과 훗카이도 출신 화가인 Matsuk


1. 일정에 욕심을 내서 끼니를 놓치면 몸이 힘들어진다. 스멀스멀 뒷목부터 두통이 시작되고, 시야가 좁아지며, 뇌의 로딩이 약간 느려진다.


뒤늦게 배고프다고 허겁지겁 먹으면 또 체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1. 1600키로 날아온 여행에서 쇼핑하는데 시간을 쓰면 좀 아깝다. 테토남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에 올블랙 지샥시계를 구입한거 빼고는..




1. 로컬 라이브 재즈바 Slowboat를 찾아낸 내가 자랑스럽다. 10명 남짓 사람들과(시애틀에서 특허 관련 사업하는 미국인, 한국에서 여행 온 친구 등) 10평 좁은 공간에서 음악으로 한마음 되는것도, 그들과 손짓발짓 대화하려고 시도하는 것도 스스로 칭찬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한끗 용기 없음에 스스로 실망한다. 세금 이슈 때문에 한국 로펌과 일하고 있던 시애틀 친구는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날의 기적같은 만남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좀 더 의미를 가지려면 가령 연락처를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의 용기가 없어서일지 아니면 누군가와 인간관계에서 어느 선 이상으로 엮이기 싫어하는 성향 때문일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삿포로 하늘로 휘발해버린 그날의 만남이 나의 한계를 보여주는거 같아 조금 자책했다.


그러나 낯선 이들과의 만남만으로도 분명 깨닫는바가 있었으니, 나의 용기 없음을 계속 자책하진 않기로 한다. 예를 들어 능숙한 외국어 능력과 현지인 같은 여유는 호감과 동경을 갖게 하지만, 자칫 수위를 조금 넘으면 상대방이 빈정상할 수 있다는걸, 시애틀 친구와 한국인 친구의 대화 속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태도가 없다).

삿포로에 있는 재즈바 Slowboat는 훗카이도 출신 재즈피아니스트 후쿠이 료의 아내분이 운영하고 있다.




1. 난 확실히 언어를 여러개 하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동경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 친구가 일본어도(일본 애니를 그렇게 좋아했단다), 영어도(오하이오에서 대학을 나왔단다) 자연스럽게 하는 모습이 멋있고 부러웠다.


생각해보면 내가 와이프에게 호감을 느낀 지점도 비슷한데, 그러면 와이프는 만면에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이런 멘트를 날린다.


“영어 잘하는 모습에 반한 남자가 몇 돼”

"....."




1. 밴드 중 드럼 치는 연주자는 신기하게도 시종 스마일 표정으로 연주했다. 계속 웃는 표정이고, 혼자 조용히 폭소 터지기도 하고. 그런데 연주는 또 기가 맥히게 하는거다.


저 사람은 엄청난 실력을 무기삼아 긴장하지 않고 이순간을 오롯이 즐기는구나. 난 단순 음악 감상만으로도 이런 황홀함에 젖어드는데, 직접 연주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어나더레벨 감정은 저런 것일까. 드럼 신동 이짱구는 그 애비가 차마 다다르지 못한 감정까지 꼭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이름 모르는 이 유명 드러머는, 마치 장난감 다루듯 드럼을 연주했다.


1. 저녁 11시59분까지 반납해야 하는 포로클 자전거를 11시56분에 반납하는 칼같은 사용시간을 선보이며 자유일정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녹초가 될법한데도 호텔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던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뿌듯함과 성취감이 그 순간 정신을 지배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특별한걸 한게 아니라, 자전거 타고, 카페 가고, 식당 가는 지극히 일상적인 걸 했을 뿐인데, 단지 그 무대가 일본이라는 낯선 동네이다보니, 마치 미션을 수행하는 것처럼 특별해진 것이다. 한국에서 커피 주문하는건 일도 아니지만, 말도 안통하는 이곳에서 자전거를 빌리고, 커피를 주문하고, 구글맵으로 맛집까지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그게 하나씩 자신감으로 쌓인거다. 어쩌면 호텔 조식을 먹기 위해 일본인 종업원에게 ‘오하이오’를 내뱉은 순간부터, 의식하지 못한 자신감이 적립되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고.




이게 하루동안 혼자 돌아다니며 떠올린 생각이다. 평소에 그만큼 생각을 안했던지(텅텅), 아니면 스마트폰의 알고리즘에 내 생각을 맡겼던 것인지. 마구잡이로 분출하는 생각의 파편들이 꽤나 낯설고 소중하게 느껴져서 기록하고 싶어졌다.


어쨌든 생소한 곳에 던져진 나를 보며, 수많은 군중 속에 하나라는 보잘것 없음과, 그렇기에 맘 내키는대로 뭐를 하든 상관없겠다는 무한한 자신감을 동시에 느낀채, 40세 기념 여행을 무사히 마친다.


이제 알았다. 나는 빌게이츠의 생각주간(Think week)처럼 일주일씩 있을 필요도 없고(물론 난 빌게이츠가 아니다), 그저 하루, 혼자만의 시간으로도 충분히 사유하고 자족한다. 그냥,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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