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40

나는 태양이다. 하지만 그분들은 행성이 아니다.

나이 40 자식에게 70 부모란

by 짱구아빠

마음 졸이며 주말을 보내고 있다. 토요일 아침 연거푸 전화를 받지 않으실땐 약간 초조하기도 했다. 장사하시는 분이 전화 안받을리가 없는데 그러면서. 물론 나중에 콜백 오셨을때는 연락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무심하게 전화를 받았다.


엄마 건강검진에서 2.5cm 거대 뇌동맥류라는 듣도보도 못한 검사지를 받고, 바로 외래진료를 잡았다(10mm 넘으면 수술을 권장한다는데 2.5cm라니..). 진료날짜는 월요일 오전. 그래서 주말동안 부디 아무일 없이 지나가길 바라며 매시간 카톡, 전화, 영상통화로 번갈아 체크하고 있다. 그럴거면 대구 내려가서 직접 케어하면 될텐데 왜 안내려가냐고? 자식에게는 또 그 자식이 생기고 지켜야할 가정도 생겼고 하는 일도 있고, 마음 내킬때마다 가기 쉽지 않다.


올초에는 아빠가 부정맥으로 인공심장박동기를 달았다. 천하의 대구 양관식 오애순에게도 쉽지 않은 시기이다. '부모님이 이제 나이가 좀 드셨구나' 라는 생각도 새삼 들고, 꼭 그것때문은 아니라도 영상통화로 보는 엄빠의 얼굴을 보니 세월의 흐름을 부인할 수 없는 때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나이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다. 나원주 교수도 본인의 아버지인 나태주 시인의 책 추천사에서 '나이 마흔에도 어른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신적 성숙도가 생물학적 나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 부모는 여전히 필요한 존재이고, 내가 먼저 그들의 나이듦을 부정하고 싶다.


그래서 괜히 조바심이 들어, 내가 기억하는 여전히 한창일 때 엄빠의 모습을 기록해놓으려 한다.



1. 아빠


어릴때는 아빠가 너무 무서워서 식탁에서 같이 식사할때 덜덜 떨면서 밥을 먹었다. 평생 운동을 하셨던 아빠의 30대는 그야말로 파이팅과 카리스마가 넘쳤다. 선명하게 머리 속에 남아있는 장면 2가지. 첫번째는 뭔가 잘못한게 있는 5세 남짓 여동생이 현관문 밖에서 펑펑 울고있고, 현관문 안에서는 아빠가 오른손에 골프채를 들고 서있다(5세 아이를 훈육하는데 골프채라니..!! 물론 아빠는 포스만으로 훈육하셨고 체벌을 하신 적은 없다). 두번째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낯선 남자와 살벌하게 말다툼 하시는 아빠의 모습이다(방금 그 여동생을 오른손으로 들쳐안고서. 그 남자와는 왼손으로도 충분히 해볼만하다고 생각하신듯 ㅎㄷㄷ).

초등학교때에는 4시경만 되면 아빠와 축구공을 가지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러면 퇴근 안하고 운동하고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 축구에 미쳐있던 또래 친구, 근처 동네에 살면서 조기축구회도 하시는 김 화백 아저씨와 그 아들 석기 등이 모여 작은 골대를 양쪽에 두고 풋살을 했다. 두어시간 얼굴 시뻘개질때까지 운동하고 집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었다.


아빠가 선수들을 데리고 나간 올림픽에서 아쉽게 은메달을 땄을때, 고등학교 동아리 방에서 혼자 울었다. 학창시절 아파서 양호실 가겠다고 뻥친 적이 딱 한번인데, 바로 이때 올림픽 중계를 보러갈 때이다.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반 대항으로 농구시합을 하는데 반 대표로 뽑혔다. 그런데 시합 당일, 유독 에러도 많았고 시합에서 졌다. 나중에 아빠가 그 시합을 직접 보러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부끄러웠다. 명색이 아시아 인구 중 체조를 가장 잘한 사내의 유전자를 받았는데 운동 못한다는 말은 본능적으로 듣기 싫었나보다.


대구 내려와서 한동안 일이 잘 풀리지 않던 시절,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아빠의 뒷모습이 기억나고, 공부에 바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내 감정은 더욱 또렷히 기억난다(무심했던 내가 이제와 부끄러운 모양이다)


뭐라도 하려고 했던 아빠는 이마트 같은 큰 대형마트에서 짐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하셨다. 아침 일찍 차 타고 나갈때 공기가 시원해서 좋다고 하셨고, 짐 옮기다가 옛 제자를 만나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모른척 했다는 말씀도 하셨다.


아빠와 '록키 발보아'라는 영화를 보러 같이 갔다. 왕년의 전설적인 복서, 록키(실베스타 스텔론)가 현역 복서와 이벤트성 경기를 하며 투혼을 불사르는 내용이다. 아빠와 나 둘다 텅 빈 영화관에서 엔딩 크레딧 끝까지 올라갈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아빠는 예전 생각이 나셔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로 그 영화가 감동적이라 끝까지 앉아있었다.

장사 마치고 늦은 저녁, 부모님은 장수생 아들을 응원하러 학교에 놀러오셨다. 깜깜한 법대 건물 1층 로비 소파에 전세낸 것 마냥 퍼질러 앉아 수다를 떨어댔다. 웃다가 진중하다가 슬프다가, 문득 아빠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2. 엄마


내가 이것저것 맡은게 많아서 학교에 자주 오셨다. 멀리서 엄마가 보이면, 이OO!!!!! 이라고 엄마 이름 석자를 큰 소리로 외쳤다. 반가움도 있고, '나 마마보이 아니야'라고 남들에게 센 척 해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윤선생 영어를 했는데 정기적으로 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하셨다. 선생님과 대면하여 수업하는게 그렇게 싫어서 나 없다고 해달라고 졸라댔다. 그러면 난 방문 뒤에 숨어있고, 엄마는 찾아오신 선생님께 자초지종 설명하고 돌려보냈다. '내가 그때 모질게 맘 먹고 너를 공부시켰어야 했는데..‘ 요즘 엄마가 제일 후회하는게 바로 그것인데, 도리어 난 엄마에 대한 믿음이 그때 생겼다고 본다. 영어도 아직까지 좋아한다. 무엇보다 내가 잘하는거보다 영어 잘하는 와이프 만난게 훨씬 삶이 편하다. 돈도 잘 벌어요. 통역 다 해줘요. 덕분에 외국도 나가봐요 등.


이성 친구가 생길만한 기회는 기가 맥히게 포착하여 사전에 차단하셨다. 대부분 그 차단벽을 뚫지 못했고, 어렵사리 차단벽을 뚫고 나갔던 몇 안되는 자리에서 이성 친구를 사귀었다.

엄마한테 딱 한번 욕을 한 적이 있다. 그 차단벽을 뚫으려는 시도 중이었을 것이다. 역시나 어려워지자, 난 컴퓨터 화면을 보며 혼잣말로 'x발'이라 했고, 엄마는 흠칫 놀라 '칫' 하고는 자리를 뜨셨다. 지우고 싶은 기억 중 하나.


세상 누구보다 친절한 사람이지만, 제대로 싸울 때는 아주 걸쭉한 단어들을 속사포처럼 내뿜으신다. 칠성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단련된 것일까. 한번은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랑 시비 붙으신걸 봤는데, 그 남자 벙쪄서 아무 대꾸를 못했다.


얼마 전 본가에 내려갔다가 엄마의 일기를 본 적이 있다. 동생이 일기장 써보라고 보내준 모양인데, 거기 이런 글이 있었다. '요즘 밥을 하는게 너무 두렵고 무섭다'. 아빠의 건강을 염려하여 밥을 잘 차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힘드신 모양이었다. 이 정도로 압박을 느끼시는줄 미처 몰랐다.


마음 속으로 대단한 신앙심을 갖고 계신 카톨릭 신자인지라, 헤어질 때는 항상 나를 향해 십자가를 허공에 그으시곤 한다. 주님의 은총 안에 이 아이를 보호해주소서 이런 느낌이다. 정작 본인은 거의 미사를 안가시는거 같은데..




두 분에 대한 기억이 이거 뿐이겠냐만은, 끄집어내면 줄줄이 사탕처럼 나올거라 이 글을 마무리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만큼 증오도 크지만, 종국에는 기대게 되는 유일한 존재들.


더 그럴듯한 말로 부모를 표현하고자 머리를 암만 굴려보지만, 이것보다 더 나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나는 태양이다.

하지만 그분들은 행성이 아니다.

그분들은 우주다


- 마거릿 렌클, 우리가 작별인사를 할 때마다










이 글을 저장해놓고 일주일이 지났다. 엄마는 월요일 첫 타임 대학병원 진료를 들어갔는데, 교수 왈 '이거 2.5cm가 아니라 2.5mm이네요. 판독교수가 잘못 썼어요. 영상보니 87세까지 살 확률이 99.8%이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으잉? 검진센터에 연락해서 재판독을 요청하니, 센터 의사 3명이 재판독을 한 결과 잘못 기재한게 맞다고 한다. 센터 책임자가 전화와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너무 죄송하다고 했다. 주말동안 온 가족이 걱정과 패닉에 분주했던걸 생각하면 화가 좀 났지만(나중에 들었지만, '우리가 그렇게 이혼하고 싶어도 이혼 안했는데, 결국 이렇게 헤어지나봅니다'는 말까지 서로 나누셨다고 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해프닝이라도 잘못 판독한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덕분에 두 분도 건강에 대해, 서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훨씬 애틋해보인다.


과연 그 애틋함 얼마나 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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