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내게 준 위안
책이 정말 얇았다.
독서 해야지 해야지 생각만 하던 나같은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었다. 1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완독할 분량이니 구매 욕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맡겨진 소녀'를 먼저 읽었고, 아저씨와 서로 덥썩 포옹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찌릿찌릿했다. 이런 여운을 남기는 작가는 도대체 누구야? 이렇게 얇은 책을 쓰면서도 거의 10년에 한번씩만 출간한다고? 도대체 얼마나 압축해서 꾹꾹 눌러담길래 그럴까?
이름도 국적도 낯선 이 아일랜드 작가의 다음 작품을 바로 구매해서 읽었고(덕분에 올해 책을 2권이나 읽었다!!), 내 삶과 시선이 인정받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작가가 이렇게 얘기해주는 듯 했다.
'그렇게 살아도 옳아'
과분하게 넓은 집, 사랑 가득한 와이프와 짱구, 나의 버팀목 부모님과 장인어른네, 친구같은 동생네, 안정적인 직장과 젠틀한 동료들.
현재 내 삶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행복은 살얼음 같아서 언제든 바스라질 수 있고, 지금 모습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오직 현재에 집중하려고 한다.
허나 부족하다 할 수 없는 삶 속에서 뭔가 계속 놓치고 있다는 찝찝한 생각이 들었다. 나만 이렇게 잘 살아도 되나, 나만 잘 살아서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와이프에게도 가끔씩 얘기했고, 고맙게도 이런 알맹이 없는 마음을 이해해주었다.
하지만 아이 교육과 부동산, 노후 준비 등 주요 대화 주제에서는 한참 밀릴수 밖에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어려운 이들의 이야기를 가끔 기사로 접했지만, 안타까움을 느끼는 걸로 끝이었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날아오는 소식에는 일부러 눈과 귀를 닫았다.
그렇게 하니 처음에는 충격적인 내용들도 무뎌져 갔다. 점점 비슷한 환경의 사람들이랑'만' 약속을 잡고, 그들과 마실 와인을 샀다. 체면이 있으니 가성비 와인은 찾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 텃밭만 열심히, 아름답게 가꾸고 있었다. 옆 밭에서는 좀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저 멀리 밭에서는 굶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월 몇만원의 후원금을 두어군데 자동이체하면서 바쁜 삶 와중에도 할만큼 하고 있다고 자기 위로를 했다.
그래도 와인 취기가 오르면 마음 속에 돌덩이 하나 얹은 듯한 무거움이 문득 느껴지기도 했다. 이래도 될까, 그걸로 충분할까?
작년 강원도 원주에 가족 여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한산한 왕복 4차선 도로를 오리떼가 건너가고 있었다. 만화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 어미가 앞장서 가고 그 뒤를 새끼 여덟마리 정도가 졸래졸래 따라가는게 어찌나 귀여운지, 비상등을 켜놓고 잠시 정차해서 구경했다.
그런데 아뿔사, 도로를 다 건너온 새끼 중 한마리가 그만 하수구 구멍에 빠져버렸다. 만화같던 풍경이 갑자기 흙빛으로 변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하수구로 달려가보니, 구멍 밑에서 새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도로를 무사히 건넌 오리 가족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풀숲에서 같이 소리를 질렀다.
안간힘을 써도 하수구 뚜껑은 열리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긴 우산을 산 다음 하수구로 내려보았지만 길이가 짧았다. 어떡하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 안에는 더위에 힘들어하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내가 왜 이 장면을 보았을까. 안보고 지나쳤으면 몰랐을텐데, 빌어먹을 봐버렸으니 못본체 지나갈수도 없고. 괜히 봤다 싶었다.
번뜩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낸 강원도 관할구청과 야생동물구호대?에 연달아 전화했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담당자분이 오신다고 했다. 바로 좌표를 찍어드린후 자리를 떴다. 서울에 도착할때쯤 담당자분께 이런 답장을 받고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구조해서 어미품에 돌려줬네요”
노숙하는 어르신, 삐쩍 마른 길고양이, 밥 못먹고 등교하는 어린 아이들을 모두 구할 수는 없다.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고, 전업으로 봉사를 하지 않는 이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사회 안전망이 해줘야할 부분도 있다.
하지만 눈으로 직접 보았다면, 못본체 지나가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는 다 해보는것. 이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 아닐까.
아마 소설 속 빌 펄롱과 마을 사람들도 수녀원의 만행을 알았을 터이다. 단지 권력이 무섭거나, 삶이 바쁘거나, 내가 직접 피해보는게 아니거나, 귀찮아서 침묵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만 잘 살아도 되나'라는 불편함이 목에 턱턱 걸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과거에 받았던 사소한 친절들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빌 펄롱은 결국 익숙한 집으로 가는 길 대신 어두운 수녀원으로 발길을 돌려 소녀 세라를 데리고 나오는 ‘사소하지 않는 행동‘에 이르렀다.
소설의 뒷 이야기를 한번 상상해보았다. 빌 펄롱이 소녀를 데리고 와서 집 문을 연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다른 가족 구성원의 동의를 받지 않은채 생면부지 소녀를 집으로 데려가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가족들이 우호적인 반응을 할 수가 없다. 수녀원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동네에서 정상적인 삶이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수녀원에서 데리고 나왔다는 자체만으로 소녀에게 희망을, 이웃들에게는 자각을, 수녀원에는 긴장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직접 데리고 살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수녀원보다는 안전한 다른 보호기관에 연결시켜주는 등 방법을 알아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최악의 일은 벌어지지 않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작가가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듯해서 큰 위로를 받았다.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주인공 아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또한 차갑지 않아서 와이프도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와이프라서, 만약 내가 낯선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오더라도, 세차게 내쫓지 않고 같이 방법을 고민할 사람이란걸 안다. 빌 펄롱도 그런 아내임을 알기에 용기를 냈을 것이다.
돈 없던 시절 축복과도 같던 50만원 장학금, 뻔히 돈 없는거 아는데도 고시공부하는데 용돈하라며 굳이 5만원을 쥐어주던 막내 삼촌(하늘에서 잘 지내쥬?), 이력서 내는 족족 떨어지는 와중에 진심을 담아 격려 이메일을 보내준 이름 모를 업계 선배들.
힘든 시절 사소한 친절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만약 그 친절들이 없었다면 수녀원에서 고통 받는 이는 그 소녀가 아니라 다름아닌 나 자신일수도 있었기에, 최소한 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대해서는 할수 있는 만큼 도우라는게 작가의 메시지라고 내맘대로 해석하고는,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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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내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방종우 신부님, 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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