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 간 사나이

나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장렬히 전사한 후

by 짱구아빠

짱구야 일어나 오늘도 유치원 가야지

너 또 안 간대 너 또 꾀부려

엉덩이 한 번 맞아볼까


짱구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할 때마다, 침대 머리맡에 틀어놨던 노래다. 그러면 희한하게 흥겨운 전주만 듣고 부스스 꿈틀대며 일어난다. 가수 김광진의 노래 중 ‘편지’는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와 더불어 아름다운 노래 가사로 1등 먹을 것이고, ‘동경소녀’의 멜로디는 한번 들으면 6개월에 한번 꼭 생각날 것이다. 그리고 ‘유치원에 간 사나이’는 아이를 위한 곡이자 어른을 위로하는 곡이다.



짱구야 일어나 오늘도 늦으면 안돼

우리 시합해 우리 뛰어가 비행기보다 빨리가자


가끔 아침에 짱구 등원을 시킬 때가 있었다. 9시 출근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부산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실제로 비행기보다 빨리 가야 했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유치원까지 “오늘도 늦으면 안도야애애” 노래를 부르며 뛰어갔다.



저녁이면 날마다 아빠를 기다리지

빗자루를 들고서

세균맨 물리치며


짱구도 내가 퇴근하자마자 복싱, 레슬링 하자고 조른다. 저녁도 아직 못먹었는데.. 8세 남아의 넘치는 에너지를 유치원과 학교에서 누르다가, 집에서 그 에너지를 화산처럼 분출해야 비로소 잠이 온다.


8세쯤 되니 제법 덩치와 힘이 생겼다. 적당히 몸싸움을 하고나면 현기증이 돌고 어질어질하다. 짱구가 잠들고 난 10시가 되면 나도 녹초가 되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가끔은 (사실은 좀 많이) 저녁에 혼자 자유시간을 갖고 싶지만. 곧 있으면 부모보다 이성친구를 찾을테니



예전엔 몰랐지 유치원 마중 나갈 때

두 손 벌려서 아빠 부르면

내 가슴이 뭉클하단 걸


다들 그렇게 공통적으로 ‘10년설’을 얘기했다. 10살이 지나면 친구랑 놀면서 부모에게 자유시간이 생긴다고 말이다. 나에겐 여전히 변수2가 있어서 가능한 시나리오일까 싶지만, 어쨌든 아빠 찾는 시간이 유한하다고 생각하니 또 마음이 달리 먹어진다.


오히려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여자친구가 생겼다면서 색종이에 'I love you 사랑해 100조'를 써서 주고받았다나(8세에 사랑해를 얘기한다고?), 본인은 queen guard 라면서 코를 킁킁대며 앞장서 걷는 연습을 하는데(강아지야?), 어쩌면 짱구에게 10년은 좀 길지도 모르겠다.



야- 자 모두 덤벼라 자 모두 비켜라

약한 모습 안돼 안돼

너 혼자서 일어나는 걸 배워봐


배우 장동건이 어느 유튜브에서 이 노래를 듣다가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이 감정을 알아채다니, 장동건도 평범한 보통 사람이구나 내적 친밀감이 느껴졌다. 나 또한 운전하다가 누가 볼까 부끄러울 정도로 울어봤다. '모두 덤벼라'를 목청껏 부르면서 목이 메여 끄억끄억 울었다. '모두 비키라'고 세상에 외쳐대고 싶었나보다.


사실 회사에서 일머리가 있는 편이 아니다. 일잘러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직까지 일의 경중을 잘 모르겠고, 모든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 와중에 대학원을 다니겠다고 일은 벌려놓았다. 모든 과제와 글을 데드라인 끄트러미에 겨우 제출하는데, 투여한 시간 대비 퀄리티가 낮다. 아내는 만학도에서 '만'자는 빼고 '학도'라고 부른다. 과제 앞에 푸석한 내 얼굴 앞에서 '학도야 우지 마라' 노래를 계속 불러대며 놀린다.


그래도 여기저기 비벼대고 이메일 카톡으로 굽신대며 여기까지 왔지만, 요 며칠은 시종 무력함을 느꼈다. 내가 쓰는 이 글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걸로 소비한 시간이 어떤 의미가 있나, 내 밑천이 훤히 보이는데도 놓지 못하고 있는 욕심은 오히려 모두에게 해롭지 않은가


온갖 잡생각에 허우적대니, 이번 심사는 ‘철회’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해보는데까지 해보자는 심정으로 구멍 숭숭 뚫린 전형적인 용두사미 글을 던졌다.


결과는? 차분히 다시 생각해보자는 정중한 코멘트를 받고 ’철회‘당하였다. (당연한 결과이고, 오히려 이런 허접구리한 글을 읽느라 시간내신 지도교수님께 심심한 사과를..) 당장은 세상 알아봐줌 없이 사라질 글과 시간이지만, 이전보다 몇 mm 앞으로 나갔고, 내 한계를 확인하는 큰 수확을 거뒀다고 토닥토닥해본다.


치열했던 나혼자 전투의 흔적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이 작은 전투를 치르는 가운데 가장 떠오르는 두 단어가 ’무가치함‘과 ’유치원에 간 사나이‘였다. 메타인지 안되는 무가치함을, 다 덤비고 비키라는 마음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앞으로도 무수히 치를 전투에서 나의 무가치함과 싸울테지.. 그때마다 ‘유치원에 간 사나이’는 나를 위로해줄 것이다. 그리고 곧 방영하는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로 다시 한번 위안받길 기대한다. 4월 18일 대개봉 (관계자 아님, 광고 아님)

천문학자도 자신의 쓸모없음과 싸우다가 책까지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