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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서관 <길 위의 꿈>
엄마는 매일 모든 게 지겹다고 했다. 아빠의 밥을 차려주는 것도 싫고, 내가 물건을 잃어버렸다며 찾아달라는 것도 싫다고 했다. 나와 아빠는 매일 엄마의 눈치를 봤다. 엄마,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갈까? 여보, 내가 오랜만에 설거지 해줄까? 그러면 엄마는 눈치를 보면서 눈앞에서 알짱거린다고 또 짜증을 냈다. 사춘기 때 부모님을 힘들게 하면 갱년기에 전부 돌려받는다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마침 직장도 한창 바빴던 터라 나는 일을 핑계로 매일 집에서 아침 일찍 나와 밤늦게 들어가곤 했다. 은퇴해서 매일 집에 있는 아빠만 엄마의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짜증에 나날이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나도 주말은 피할 수 없었다.
엄마의 지겹다 소리에 덩달아 지겨워진 나는 이번 시즌이 지나고 나면 회사에 휴가를 내고 배낭여행이나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집이 외박에 대해 그렇게 엄격한 편도 아니었고, 어차피 엄마도 나와 아빠가 주말마다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게 꼴 보기 싫다고 했으니 내가 한동안 집을 비우면 윈윈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홀로 짜증받이가 될 아빠가 약간 불쌍하긴 했지만, 대략적인 여행 일정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엄마, 나 한동안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었어서 이번 시즌 끝나면 휴가 내고 배낭여행 좀 다녀오려고."
"어, 그래라."
엄마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성의 없게 대답했다. 요즘 엄마가 짜증내지 않는 시간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 때뿐이었다. 그래서 나와 아빠는 엄마가 드라마를 볼 때면 일시적으로 찾아오는 달콤한 평화를 누리고는 했다. 어쨌든 엄마가 드라마에 빠져있는 틈을 타서 대충 얘기를 했으니 바로 비행기 표를 끊으면 되겠다 싶었다. 그 때, 아빠가 슬그머니 노크를 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딸, 얘기 좀 하자."
"응, 왜?"
"너 이번 배낭여행에 엄마 좀 데려가라."
"뭐라고? 그게 무슨 배낭여행이야! 숨통 좀 트이려고 가는 건데 맨날 짜증내는 엄마를 데려가면 어떡해! 아빠 혼자 편하려고 그러는 거지?"
"너네 엄마 너랑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아니야, 내가 아까 여행 간다고 말했더니 드라마 보느라 대꾸도 안 하더라. 별 관심도 없었어."
"너 혼자 여행 간다니까 서운해서 대답 안 한 것 같은데……."
"엄마도 몇 달 전에 친구들이랑 패키지로 다녀왔잖아. 엄마가 여행 자주 못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일 년에 두세 번은 모임 친구들이랑 같이 나가는데 뭐가 서운해."
"딸이 패키지 간다고 한 게 아니잖아. 엄마는 맨날 자유여행 가고 싶어 했었는데 이것저것 예약하는 것도 할 줄 모르고 무서워서 못 갔었잖아. 그런데 딸이 혼자 자유여행 간다니까 완전 서운한 눈치던데?"
"거짓말!"
"야, 혹시 아냐. 이번에 한 번 데려가주면 너네 엄마도 좀 온순해질지. 집에 있기 맨날 지겹다잖아. 딸이 효도 한 번 해."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엄마와의 여행을 상상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어렸을 때는 엄마와 여기저기 참 많이 다녔던 것 같은데, 내가 어른이 된 이후로 우리는 서로의 여행 스타일이 극명하게 차이난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동행을 제의하지 않아왔다. 여행은 친한 친구랑 같이 가도 절교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는데, 엄마와 여행을 간다면 매일 싸울 것이 분명했다.
일단 나는 사진 찍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러나 엄마는 장소를 옮길 때마다 찰칵찰칵, 같은 장소에서도 포즈만 바꾸어가며 다섯 장이고 열 장이고 사진을 찍었다. 포즈를 이렇게 취해라, 다리가 좀 더 길어보이게 찍어야지, 주문도 많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엄마와 같이 여행을 갔던 적이 한 번 있었는데, 사진 문제로 다투었던 기억이 났다.
여행 가서 사진을 어마어마하게 찍는 건 엄마 세대의 공통점인지 친구들과 여행을 한 번 다녀오고 나면 엄마 핸드폰의 갤러리에는 사진이 수백 장씩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아빠를 닮아 무뚝뚝하고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는 나는 각종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 다소 민망했다.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내 지론은 '사진에 집착하면 그 순간을 맘껏 즐길 수 없다'로, 기껏 여행을 가서 머릿속 가득 어떻게 해야 예쁜 사진이 나올지만 고민하는 것이 싫었다. 그냥 그곳에 사는 현지인들이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순간들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 엄마를 데리고 배낭여행을 간다면? 사진기사로 전락할 내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고작 사진 문제로도 나와 여행 내내 싸울 것이 뻔한데, 엄마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나와 같이 여행을 가려고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좋아, 엄마하고 얘기해보고 엄마가 알았다고 하면 데려갈게."
아빠는 내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엄마, 나 이번에 배낭여행 갈 건데 혹시 같이 가고 싶어?"
엄마가 TV에서 눈을 떼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네가 어쩐 일이니. 나한테 여행 가자는 말을 다 하고."
"근데 만약에 나랑 이번에 같이 가게 되면, 엄마가 집에서처럼 매일 짜증 부리는 건 싫어. 그러니까 나한테 사진 찍는 걸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자유여행은 패키지와 달라서 신경 쓸 부분도 많고 불편한 점도 많을 텐데 그런 거 다 감수해야 돼. 호텔에서 편하게 못 자고, 관광버스로 이동도 못해. 소매치기 걱정도 두 배, 세 배로 해야 하고, 가이드의 설명도 없어."
나는 속사포처럼 나와 함께하는 자유여행의 단점부터 쏟아냈다. 이 정도면 엄마도 같이 갈 엄두를 못 내겠지 싶은 비겁한 마음이었다. TV 화면만 한참을 응시하고 있던 엄마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좋아."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엄마가 드라마 보느라 내가 방금 말한 것들을 새겨듣지 않았나? 그러나 TV 화면을 보니 드라마는 끝나고 김치냉장고 광고만 나오고 있었다. 엄마가 자유여행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다는 아빠의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나는 엄마와 함께 파리행 비행기에 함께 올라 있었고, 우리는 긴 비행시간을 지나 파리의 허름한 호스텔 침대에 걸터앉아 짐을 풀었다. 엄마와 함께 파리에 온 건 두 번째다. 중학생 때 엄마와 패키지여행으로 서유럽을 돌았었는데, 그 때에도 파리 드골 공항으로 입국했었다. 지금보다 10년씩은 더 젊었던 우리는 호텔에 도착해서 컵라면을 끓여 먹었다. 긴 야간비행의 피로를 모두 날려버릴 만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컵라면이었다.
"밖에 아직 문 연 곳들 좀 있던데 뭐라도 사와서 먹을까?"
"나는 배가 안 고프네. 너 배고프면 뭐 좀 사다먹자."
"아냐, 나도 그렇게 배고프진 않아. 얼른 자고 내일 일어나서 맛있는 거 먹자."
50을 훌쩍 넘은 엄마는 이젠 시장기보다는 피로함이 먼저인지 씻고 나오자마자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다 덮고 있었다. 우리는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행의 설렘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엄마와 한 침대를 쓰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생경함 속에 파묻히고 싶어 떠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여행은 다른 의미로 정말 생경했다.
그 날 밤 나는 잠결에 뒤척이다 엄마와 몸이 닿았다. 분명 온기가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앙상한 나뭇가지와 닿은 기분이 들었다. 밖에는 조용히 눈이 내렸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샌 나는 내일부턴 반드시 캔맥주라도 사와서 마시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의 안색을 보니 엄마도 푹 잔 것 같지는 않았다.
"잘 못 잤어?"
"집에서는 매일 TV 보다가 스르르 잠들었는데 티비를 안 켜놓고 자서 그런지 잠이 바로 안 오더라."
"켜 놓고 자지 그랬어."
"전부 프랑스어라 한 마디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뭐."
엄마는 밤에 TV를 켜 놓고 잤었구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언제부터 TV를 이렇게 많이 봤었지. 사실 나는 엄마가 TV 보는 것이 싫었다. 물론 드라마에 빠져있을 때만큼은 엄마의 짜증도 멈추었지만, 독서광이었던 엄마가 언제부터 책을 손에서 놓고 TV를 훨씬 더 많이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왠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매일 지겹다 소리를 반복하는 것도 어쩌면 하루 종일 TV만 보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커튼을 열어보니 밤새도록 내린 눈에 우리의 숙소가 있는 골목이 온통 하얗게 바래있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지붕에 눈이 가장 소복이 덮인 카페를 골라 아침식사를 했다. 조용한 카페에 울려 퍼지는 포크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지붕을 톡톡 건드려 눈을 털어낼 것만 같았다. 나는 맘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요즘 왜 책을 안 봐? TV가 책보다 더 재미있어?"
"이제는 책 찾아 읽는 게 귀찮네. TV는 켜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데 책은 직접 찾아 읽어야 하니까."
"나 어렸을 땐 우리 도서관 같이 정말 많이 다녔었는데, 그치."
"그 때 네가 책 읽는 걸 워낙 좋아해서 그랬지. 나도 맘껏 읽게 해주고 싶은 욕심 때문에 열권씩 빌려서 배낭 가득 짊어지고 오느라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었어. 그래서 네 외할머니가 애 책 좀 그만 빌려오라고, 너 골병들겠다고 했었지."
"엄마도 책 되게 좋아했었잖아. 내가 엄마 닮아서 그랬나보다."
"그러네. 요즘은 내가 책 안 읽은 지 참 오래된 것 같네."
나는 이때다 싶어 말을 꺼냈다.
"이젠 내가 가끔 도서관 가서 엄마 읽고 싶은 책 빌려다줄게. 읽고 싶은 책 생기면 나한테 말해!"
"매일 바쁜 네가 퍽이나 도서관 가서 책 빌려올 여력이 있겠다. 그리고 요즘은 읽고 싶은 책도 딱히 없어."
"엄마 매일 지겹다며. TV만 보지 말고 예전처럼 읽고 싶은 책도 찾아 읽고, 글도 쓰고, 하고 싶은 일도 찾아보자."
"딸, 엄마는 이제 옛날만큼 의욕이 없어. 복잡한 생각하기도 싫고."
"엄마 아직 인생 다 산 게 아니잖아. 한참 남았는데 벌써 그러면 어떡해..."
"너 엄마가 책 안 읽고 TV만 보는 게 싫구나."
"솔직히 말하면 예전처럼 다시 책 읽는 모습 보고 싶어."
"너 엄마가 책 왜 안 읽게 됐는지 알아?"
"아니……."
"이제는 책을 열어보면 노안 때문에 글자가 흔들려. 그리고 책 읽다가 잠들어서 다음날 일어나서 마저 읽으려고 하면 전날 읽은 부분이 잘 기억나질 않아."
".……."
"딸, 엄마도 늙었어. 갱년기가 문제가 아니라, 엄마도 점차 노인이 되어가고 있는 거야. 지금은 글자가 잘 안 보이고, 읽은 내용이 가물가물할 뿐이지만 몇 년 후에는 여행 가서 조금만 걸어 다니면 다리가 아파 서 있기 힘들지도 몰라. 그래서 이건 아마 엄마의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여행이 될 거야. 너 어렸을 때 엄마랑 패키지여행 가서 만났던 할머니들처럼, 여행이 너무 가고 싶어질 때면 이제 엄마는 패키지여행을 갈 수밖에 없을 거야."
낯선 도시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더 이상 눈으로 보이지 않았다. 파리의 회색 공기를 담고 비스듬히 내려와 엄마의 머리칼 위로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딸, 우울해하지마. 모든 사람이 겪는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나저나 아무 카페나 찾아 들어온 건데 정말 예쁘다. 이런 게 자유여행의 묘미구나."
그 날 나는 다음날 예약해놨던 룩셈부르크행 기차를 취소하고, 몽생미셸 투어를 신청했다. 몽생미셸이 무슨 드라마 배경으로 나왔었는데 야경이 그렇게 예쁘다고 엄마가 몇 번 감탄했던 것이 기억났다. 과연 드라마 촬영지의 홍보효과가 대단하긴 했나보다. 곳곳에서 낯익은 모국어가 들려왔다. 수도원 하나 덜렁 들어서있는 바다 위의 외로운 바위섬이라는 설명과 달리 빽빽한 관광객들로 인해 결코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신나서 내게 드라마 줄거리를 읊어주었다. 여기서는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한테 어떻게 했고, 둘이 싸워서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다시 만났고…….
"그런데 우리 기차 취소해도 돼?"
"응, 우리 룩셈부르크 시티까지 카풀할 거야. 자유여행인데 남의 차 얻어 타고 국경 한 번 넘어봐야지. 기차는 패키지에서도 종종 태워주잖아."
"어머 웬 카풀이야, 우리 이러다 납치당하는 거 아니야?"
룩셈부르크로 이동하는 날은 아침 일찍 드라이버와 파리중앙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추우니까 역 안에 들어가서 앉아 있으라고 했지만, 엄마는 걱정 반 설렘 반으로 계속 밖에 나와 드라이버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우리의 드라이버는 손잡이를 돌려서 창문을 여는 구식 소형차를 끌고 나타났다. 그는 파리와 룩셈부르크를 오가면서 장거리 연애를 하는 대학생이었다. 기름값을 보태느라 카풀을 시작했다고 했다. 계속해서 눈이 내리자 그의 작은 자동차는 오르막길을 힘겨워했다. 우리는 다 같이 내려서 차를 밀었다. 엄마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하면서도 소녀처럼 깔깔거리며 누구보다 열심히 차를 밀었다.
우리의 여정은 폭설 때문에 기차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미리 알려둔 예정시간보다 한참 늦게 도착했지만, 숙소 주인은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자신을 게이 커플이라고 소개했다. 엄마는 게이 커플 집에 얹혀 자게 되다니 살면서 정말 별 경험을 다 해본다면서 또 한 번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룩셈부르크 도착 기념으로 늦게까지 여는 바를 찾아가 한 잔 하자고 제안하자, 엄마는 밤늦게 술집에 가는 건 무섭다며 마트에 가서 캔맥주나 사다 마시자고 했다. 우리는 감자칩에 캔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볼이 발그레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엄마의 엄마라면 그녀를 어떻게 키웠을지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엄마가 주말마다 어린 나를 도서관과 각종 전시회, 공연에 데리고 다니면서 넓은 세상을 보여주었었다. 내 방 수납장 깊숙한 곳에는 어린 시절의 수많은 주말 나들이 장면들이 담긴 무거운 앨범이 있다. 앨범에 담긴 수 천 장의 사진들을 넘겨볼 때면 나도 과연 엄마처럼 어린 딸에게 넓은 세상을 열정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나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던 엄마가 이제는 넓은 세상을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엄마가 여행 가서 사진 찍는 걸 저토록 좋아하는 이유는, 카메라 프레임 안에 다 들어오는 좁은 세상이 더 편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엄마가 TV를 많이 보게 된 이유는, 이제는 무언가를 직접 손을 뻗어서 움켜쥐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손 내밀면 잡힐 것 같은 브라운관 속 장면들이 더욱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벨기에의 작은 도시들을 둘러볼 무렵, 나는 갱년기를 빌미로 우리 집 폭군으로 군림하던 엄마가 사진을 찍고 싶을 때마다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 내가 귀찮아 할까봐, 자기 핸드폰을 꺼내서 경관만 찍고 지나가려는 엄마의 무안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부터 나는 엄마가 카페가 유난히 예쁘다고 하면 카페를 배경으로, 강물의 빛깔이 아롱하다고 하면 강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셀카를 같이 찍기도 했다.
엄마는 숙소에 도착하면 와이파이를 잡아 신나게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나는 엄마의 프로필을 보면서 루뱅의 화려한 시청건물을, 길을 잃고 헤매다 들어간 카페에서 마신 따뜻한 뱅쇼 한 잔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나 마주하는 길 위의 꿈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청운의 꿈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때로는 넓은 세상을 좁은 프레임 안에 넣어 두고두고 꺼내 보는 것도 길 위의 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