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열심히" 하지 않겠다의 의미
월 1억 , 아니 그 이상 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것이 “ 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적든 많든, 경험이 있건 없건, 우리는 당신이 누구든 이 시스템으로 당신을 최고의 인플루언서로, 부자로 만들어 드립니다. 선착순!
급변하는 입시제도! 공부는 전략입니다. 지금처럼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없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이것”을 합니다.
부자에게는 모두 “이것” 있습니다.
한국인의 대부분이 20대에, 30 대에 , 40 대에, 50 대에 … 이것을 안 하고 후회합니다!
2024년도 부동산을 예측합니다. 역대급 기회가 옵니다!
한 달에 200만 원을 벌던 내가 한 달에 2억을 버는 방법을 모두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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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바로 부의 추월 차선, 인생의 추월 차선이 있습니다!!!
오늘도 각종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역군들은 최선을 다해 목청 높여 소리친다!
관심경제, 주목경제 ( attention ecomomy), 관종의 경제 등 그것이 무엇이라 불리던, 타인의 시선을 끌고, 주목을 받고, 이슈가 되는 것 즉 어그로를 끄는 것이 돈이 되는 시대에 산다.
<<프로보커터, provocateur >> (김내훈, 2021)에 의하면, 우리 개인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도발자, 분탕질 치는 자, 다시 말해, 어그로를 끌어 트롤링( trolling)을 하는 소셜미디어의 유튜버들에게 맡겨 버리는 " 사유의 외주화" 현상이 작금의 세태라는 지적이 충격적이지도 않을 지경이다.
매일같이 우리가 사고, 먹고, 입고,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심지어 어떨 때 웃고 울고 화내야 할지 까지, 삶을 모조리 지배하는 걸 보면 말이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어쩌면 열심히 누군가를 " 쫓아가고" 있다는 의미일 지도 모른다.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1956)에 의하면, 실존적 존재인 인간의 불안은 자연으로부터, 혹은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공포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매우 불확실하고, 비결정적인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은 언제든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생명의 “유한함”을 그저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로부터 말미암은 인간 본연의 고독과 분리에서 오는 고통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인간은 끓임 없이 외부와의 결합, 일치, 혹은 합일을 갈망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치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구조차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의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에 살고 있다.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1956)
이러한 인간의 고통과 공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거대한 집단 속에서 극대화된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개성을 상실한 채(혹은 몰수 당한채), 사회로의 일체화에 끓임 없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불행히도 분리를 극복하고 합일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알지 못하며, 설령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합일의 본질을 호도하는 개인 혹은 사회 집단에 의해 그것의 실천에 까지 이르기 매우 어렵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평등이란 인간의 각자 개성이 살아 있고, 인간을 서로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평등이 아닌, 궁극적으로 개인의 차이를 완전히 없애는 표준화에 그 본질이 있다.
표준화된 것을 벗어나, 경로를 이탈하는 것을 불안하다고 느낀다.
좋은 대학을 갈망하고, 좋은 직장과 직업을 갈망하고, 좋은 차와 아파트를 갈망하고, 가만히 앉아서도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을 미치도록 갈망한다. 우리의 불안은 누군가의 기회가 되고 돈이 된다. 서로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 심지어, 지금의 사회는 인간을 수단 삼아 돈을 버는 방법을 각종 매스컴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선전하며 적극적으로 우리를 오도한다. 심지어, 그 대열에 오르지 못하는 이들은 패배자로 취급받기까지 한다.
불안한 학부모의 마음을, 취업 준비생의 마음을, 돈을 벌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불안한 마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와 기어이 헛된 희망, 허영, 공명을 뿌리고 우리의 주머니뿐 아니라 정신까지 탈탈 털어간다. 만약, 실패한다면 정보가 부족했고, 의지가 약했으며, 열심히 하지 않은데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끝없는 불안감과 공명심이 인간의 실존적 생명력을 조금씩 갉아먹고, 마침내는 인생이라는 큰 수레바퀴아래서 불안, 고독,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결국 소멸되는 것이 인간의 필연적 운명인 것인가?
"아주 지쳐 버리지 않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아래에 깔리게 될 테니까"
<<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 1906)
<< 수레바퀴 아래서>>는 몰 개성적, 비 인간적으로 규격화된 사회의 제도가 인간에게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고향에서 가장 총명한 한스 기벤라트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끝에 그의 출신과 배경의 한계 속에서 올라갈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인 신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합격과 함께 주어진 달콤한 여름휴가에서 단지 그가 원한 것은 그의 은둔적인 생래적 성품과 어울리는 낚시뿐이었지만, 자신의 명예욕을 채우는데 급급한 선생님들, 무지한 아버지로 인해 쉴 틈 없이 더 높은 곳을 향해 자신을 몰아세운다.
한스는 부단히 그리고 매우 열심히 안으로는 외부 세계로의 분리를 극복하고 불안을 해소하고자, 밖으로는 사회의 (사회적 성공을 위한) 표준화에 부합하고자 공부에 몰두한다. 그러나, 마침내 한스의 영혼은 흔적조차 없이 메마르고, 그를 그답게 규정할 수 있는 정신은 온 데 간 데 없이 껍데기만 남게 되어 소멸되고 만다.
사회적 성공에 대한 주변의 강한 압박과 한스의 공명심이 그의 삶을 파탄의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인가?
만약 누구라도 이 이야기에 대해 , 한스의 애처롭고 불행한 삶을 애도하지만, 결국 그는 패배자 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거나, 그의 주변인이나 상황에 대해서 그들은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 최선을 다 한 것뿐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회의 지속적인 암시와 선전에 의해 자신들도 모르게 완벽하리만큼 표준화된 것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이 글은 < 나는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지 않겠다>라는 결심에서 시작됐다.
도대체 "열심히"라는 것에 대한 의미 혹은 본질이 무엇인가.
현재 살아가는 사회가 나에게 바라는 "열심히"의 의미부터, 내가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런 나의 삶의 태도를 들여다보는 것은 과거 그리고 현재의 나의 삶을 아는 데 있어 중요한 출발점이다.
(여태껏)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의미는, 사회가 표준이라고 제시하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끊임없이 돌아가는 사회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안에서 (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의 톱니로서, 절대 탈락해서 나가떨어지지 않고 바퀴에 깔리는 일 없도록 노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닥치는 대로 살겠다라던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한 채 누워만 있는 삶으로의 변화가 아니다. 번 아웃을 겪을 때 느끼는 극도의 피로감 혹은 우울이나, 무기력증에 빠진 것도 아니며, 불안감이나 자기혐오로 비관주의에 빠진 것을 더더욱 아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다른 삶의 유형들 예를 들면, 미니멀리즘 혹은 단순하게 살기, 노마디즘 ( 아무튼, 각종.... ism) , 그것도 아니면 느리게 살기 등의 어떤 기조에 의한 삶도 아니다. 나에게 포상 휴가처럼 주는 시간도 아니고, 취미 활동이나, 여가를 즐겨 보는 것에 집중하는 삶도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생각할 때, 키워드 하나쯤은 있을 터, 나는 그중에 "열심히"라는 나의 키워드에 궁금증과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방향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무턱대고 열심히 사는 삶을 해체해 보고, 쪼개보고, 뜯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