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2024
매년, 12월 31일 우리 가족만의 연말 시상식이 열린다. 작년, 같은 날 써 놓았던 "올해의 목표"를 함께 읽으며 목표를 가장 많이 달성한 1등에게 (플라스틱) 트로피와 20불의 상금이 주어진다. 아이들이 조잘조잘 말을 할 수 있고, 그림일기를 그릴 수 있을 때 즈음 시작한 가족 연말 시상식은 여러 해를 거듭하며 , 약간의 격식과 품격이 갈수록 더해져 나름 역사와 전통이 있는 가족의 중요 연례행사가 되었다. 소박한 상금의 크기에도 모두가 한결같이 매해 1등이 되길 진심으로 원하는 이유는 목표달성을 위해 올 한 해도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 때문일 것이다.
매해 마지막 달이 가까워지면, 과연 누가 1등을 하게 될 것 같은지 예상해 보기도 하고, 올 해는 영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은 일찌감치 내년 우승을 위한 전략적인 계획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2023년도 우승에서 이미 멀어진 나는 연말이 다가 올 수록 2024년 새해를 위해 어떤 계획을 채워 넣을지 운전을 하다가도, 집안일을 하면서도, 잠들기 전에도 생각한다. 직장에서 일하다가 문득, 쓰다만 페이퍼 타월 한 귀퉁이에 써보기도 한다. 외국어 공부, 건강하게 살 빼기, 미라클 모닝, 대학원공부, 책 읽기, 글쓰기, 사진 배우기, 건강한 식단 만들기 등등..... 그러다 결국 실소가 터져 나온다. 사실 몇 가지 빼고는 몇 년째 단골로 등장하는 케케묵은 목표들이기 때문이다.
나와는 다르게 아이들의 목표는 매해 상당 부분 전 연도와 달라지는데, 나의 새해 목표는 지난 몇 년 동안 비슷했다. 쓰다 보니, 내년에도 일등은 이미 글러먹었다. 지난 몇 년동안의 블랙리스트급 계획들은 2024년에도 리스트의 자리만 채울 뿐이란 것에 왠지 확신이 들었다. 그러던 중, 책을 읽다가 시선이 멈춘 곳에 밑줄을 긋고, 여러 번 필사했던 구절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 일을 했고 그것이 아릅답다 생각했다. 그는 내면적 " es muss sein!"에 의해 인도되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며 일단 일을 끝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사람들 (그때까지 항상 동정했던 사람들)의 행복을 이해했다.... 그의 가슴속에는 피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따라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때까지 자신의 소명이라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 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는지 보고 싶은 욕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하지만 형인 톰이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되면서 모든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 8개월 동안 나에게 현실 세계란 베스 이스라엘 병원의 병실과 퀸즈에 있는 방 하나짜리 형의 아파트가 전부였다. 졸업 후 뉴욕 중심가의 고층빌딩에서 화려한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작 나에게 아름다움, 우아함, 상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의 의미를 가르쳐준 것은 그런 조용한 공간이었다.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드릭 브링글리>
서로 다른 책이지만, 이 글들에 나의 시선이 오래도록 멈추며, 나는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동안 참으로, 주어진 일과 상황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다. 늘 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잘하는 게 딱히 없으니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야 된다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그쳤다. 언제나 불안하고 조바심 나는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주어가며 살았다. 가끔, 내 맘대로 일이 안될 때면 가슴에서 불덩이가 되어 올라오는 말들, "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난 한다고 했는데,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한 것 밖에 없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힘들이지 않고 공짜로 되는 일을 바란 적이 없기에 ( 무엇이든 공으로 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 인생을 참 힘주어 살다 보니, 긴장과 스트레스는 내 머리털을 빠지게 하고, 미간에 푹 패인 주름을 남겼으며, 365일 내내 딱딱하게 굳은 어깨엔 만성통증이 떠나질 않았다.
따지고 보자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누가 강요한 적도 없고, 대충 산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하려고, 정신을 무장하려고, 지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았을까?
2024년 가족의 연말 시상식이 마치 상업영화가 판치는 아카데미 시상식 같은 거라면, 나는 올해 당당히 수상과는 전혀 무관한 독립영화를 찍자고 마음먹었다. 다수가 재미있어하지 않더라도, 돈이 되지 않더라도, 그저 감독이 찍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그런 영화. 앞만 보고 내리 달려왔던 인생 1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이제 2막 전에 잠시 쉬었다가 가기 위해 숨 고르기를 한다.
휴지기, 휴식기, intermission... 뭐라 불러도 상관없다. 올 한 해는 어쨌든 그거다!
열심히 살지 않기, 노력하지 않기, 하기 싫고 재미없으면 안 하기, 해야 하는 것은 뒤로하고, 하고 싶은 것 우선순위에 두기,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기, 계획 세우지 않기, 털어버리기, 가볍게 살기.....
인생에서 힘 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