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방늙은이의 하루
어쩌다 보니 사무실(팀)에서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아졌다.
작년까지는 위에 67년생 선배가 있었지만, 작년 말에 회사사정으로 희망퇴직으로 나가는 바람에 내가 이제
최고연차 자리를 떡하니 차지해 버렸다.
한때 잘 나갔지만? 이제는 뒷방 늙은이신세가 돼버린 중년회사원의 이야기를 해보련다.
아침에 출근하면, 가벼운 목례를 하고 각자 자리에서 PC를 켜고 업무를 시작한다. 팀원 중에 비슷한 또래들 간에는 어제저녁은 누구랑 뭘 먹었으며, 오늘은 금요일이니 퇴근 후에 어디를 갈 것이라서 드레스코드를 이렇게 맞추었다 등의 수다스러운 말들이 모니터 위로 살짝 들려온다.
나는 8층 카페테리아로 곧장 가서 맛없는 에스프레소커피를 진하게 텀블러에 한잔 담아 온다. 얼어있는 몸과 마음을 녹여본다. 자리로 와서 업무노트를 꺼낸다. 나에게 주어지는 업무의 양은 이전에 비해서 확연히 많이 줄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요청 오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짬력으로 몇 시간만 하면 끝나는 일이다. 너무 빨리할 이유가 없어서 (체력의
노쇠함을 명분 삼아) 일부러 천천히 하는 것은 영업 비밀이다.
이전대비 시간이 많이 남아, 한층 여유롭다.
바쁘게 일하는 팀원들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나도 왕년에 저들 이상으로 회사의
미래를 걱정하며 뜨겁게 불태웠던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미안함을 바로 뒤로 해버린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진다. 보통팀원들과 삼삼오오 구내식당에 식사를 하러 가지만 팀원들이 회의가 길어지는 날에는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이제는 혼자 먹는 게
너무 편하고 소화도 잘된다. 말 거는 사람 없고 식사속도 조절 안 해도 되고 내가 먹고 싶은 메뉴 먹으면 되고, 이 자유로움이 너무 좋다.
점심 후 식물원을 산책한다. 회사바로 앞에 식물원이 있어서 산책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너무 행운이다.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특히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서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점심 후 산책을 한다. 하루 중의 유일한 나의 운동시간이자 명상의 시간들이다. 지나가는 사람, 하늘로 날아가는 기러기, 흰구름, 나무, 꽃들을 보며 그동안 지나온 시간들을 회상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매일 30분 정도의 산책이 루틴이 되었다.
어느덧 직장생활 27년이 되어간다. 30년을 채우고 은퇴하는 것이 목표인데, 내 의지로만 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조그만 역할이 주어지니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데, 후배 팀장, 임원들과 같이 일을 하는 것이 많이 부담스럽고, 자존심이 무척 상하지만
아직 슬하의 아들 2명이 대학생이라 가장으로서의 마지막 역할까지 완수하고 여기를 떠나려고 한다.
아빠의 이런 마음을 우리 아들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철부지 녀석들!
요즘 직장에서의 태도 중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최소한의 개입, 부탁할 경우에만 나의
의견피력하기, mz팀원들에게 절대 실없는 농담하지 않기, 근태/보안/언행등의 기본을 잘 지키는 것 들이다. 사실 나는 완전한 E형인간이다, 입이 근질근질하고 사무실의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라테를 몇 잔을 연달아 퍼붓고 싶는 마음이 굴뚝같지만, 꾹꾹 눌러 담는다. 그런 에너지는 이제는 은퇴 후에 내가 뭘 하고 살지, 어떻게 살지, 어디서 살지 등에 대한 고민을 하는데 남겨두려고 한다.
과연 나의 30년의 마무리는 잘 될 것인가? 오늘도 불안한 미래를 생각하며 퇴근버스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