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조깅과 우중런의 조합
한동안 달리기 페이스가 좀처럼 오르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보통은 초보라도 1km를 8분 안팎에 뛰는 경우가 많다. 이를 페이스라고 하고, 8분 페이스면 800페이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나는 10분 30초쯤 걸린다. 말하자면 1030페이스. 궁금해서 1030페이스로 뛰는 사람도 있나 하고 검색해봤지만, 그런 검색어는 나오지 않았다. 흑흑.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냥 계속 천천히 뛰었다. 과체중이라서 무엇보다 부상이 무섭기도 했고. 힘들면 계속할수 없으니까. 그랬더니 어느 순간 트렌드가 나를 따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처럼 천천히 뛰는 걸 존2 러닝, 혹은 슬로우 조깅이라고 부르더라. 오히려 뿌듯했다.
힘들 때면 달리기가 생각난다. 앞길이 깜깜하고, 성취라는 게 멀게만 느껴질 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모래알을 하나씩 옮기는 일처럼 티도 안 나고 사람을 지치게 할 때.
그런데, 달리기라니. 갓생의 냄새가 확 난다. 뭔가 특별한 게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냥 음악과 신발만 있으면 된다. 물론 여성이라면 스포츠브라도 필수겠지만.
나는 매달 달리기용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 들을수록 질리지 않도록. 신나면서도 템포가 너무 빠르지 않은 노래들. 좋아하는 가수의 곡, 지인에게 추천받은 음악, 그리고 궁금했던 신곡들을 잘 섞어서 이번 달의 달리기 음악이 완성된다. 나중엔 그 음악을 듣기만 해도 달릴때의 깔끔한 무드가 느껴져서 좋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달리다 보면 어느새 1km는 훌쩍 지난다. 나는 주로 3km 정도를 뛰는데, 이쯤 되면 조금만 더 가볼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좋은 노래는 달리는 힘이 되어준다.
하루를 달리면 뿌듯하고, 이틀을 달리면 자랑스러우며, 삼일을 달리면 나 꽤 괜찮은 사람인가 싶다. 그래서 요즘은 삼일 뛰고 하루 쉬는 루틴을 만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리는 날인데, 비가 왔다. 그런데도 달리고 싶었다. 이 뿌듯한 감정을 끊고 싶지 않았다. 유튜브에 우중런을 검색해보니, 비 오는 날 달리기의 핵심은 일단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구나.나는 어차피 천천히 달리니까 우산 쓰고도 뛸 수 있을 정도지만, 뭔가 비를 맞으며 달리는 모습 자체가 더 열심히인 느낌이 들어서 그냥 달리기로 했다.
무엇을 입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어두운 색 옷을 입었다. 비에 젖으면 비칠 수도 있으니까. 렌즈를 끼는 나는 물이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모자를 쓰고, 혹시 몰라 인공눈물도 두 개 챙겼다. 운동화는 방수가 안 되니 간단한 등산화를 신었고, 방수되는 골전도 이어폰을 끼고 출발했다.
달리다 보니 점점 몸이 젖어 무거워졌다. 약간 추웠지만 몇 분 지나니 체온이 오르며 적당해졌다. 비는 처음엔 조금씩 내리다 점점 굵어졌고, 어느새 노래와 비와 내가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비 오는 날엔 평소와 다른 냄새가 난다. 생생한 비냄새, 흙냄새, 젖은 풀냄새, 그리고 의외로 좋은 꽃향기까지. 5월이라서 이런 향기가. 온도가 가능한가 보다. 모자 챙 끝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빗방울도 내 페이스처럼 일정해졌다.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비와 함께. 나는 달렸다.
집에 돌아오니 흠뻑 젖은 생쥐 꼴이었다. 그런데 기분은 상쾌했다.
우울은 수용성이다. 이 말, 샤워할 때만 적용되는 줄 알았는데 우중런에도 딱 들어맞는다.
욕실로 직행해 모자는 물 받은 세면대에 담그고, 옷은 바로 세탁기로 헹굼 탈수. 시원하게 샤워하니 아까 맡은 꽃향기에 이어 바디샴푸 향이 더해져 봄날 한가운데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에 나를 넣고 살랑살랑 헹군것 같은 기분이었고. 가볍게 춤같이 수영을 하고 온 기분이기도 했다 많이 개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