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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PD Mar 14. 2020

21살, 미국 인턴을 가게 된 이유

유학에 실패해서 Plan B로 인턴을 갔습니다.

나는 2019년 3월, 미국 LA에 있는 언론사로 인턴을 가게 되었다. 왜 갔는지 그 이유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유학에 실패해서이다. 불합격해서 못 갔다면 그건 배 부른 소리. 사실 유학이란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도, 능력도 아니요. 가정의 '자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집에 그 만한 자산이 없었고, 준비했던 유학을 못 가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절절한 꿈은 끝끝내 포기하지 못 해서 Plan B를 찾다- 우연히 '미국 인턴'이라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1년간의 미국 인턴을 마치고 최근 귀국했다. 미국 인턴을 마음 먹은 그 이유부터, 가게 된 과정, 노력, 그리고 미국에서의 그 파란만장했던 1년, 그리고 1년 후 바뀐 모습으로 한국에 돌아온 나. 정말 재밌는 이야기다. 그래서 모두와 함께 공유해보고자 여러 방안을 모색하다가, 문득 책장의 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일기를 15살 때 부터 8년 째 꾸준히 쓰고 있다. 어떤 사건에 대한 구체적이며 그 때의 심경이 가장 잘 묻어있는, 필체로부터 느껴지는 기록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다. 그래서 그 때 그 실제의 일기를 통해 이 일련의 과정들을 공개하고 싶었다.


20살부터 같은 브랜드의 일기장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4권. 공개할 때가 된 것 같다.


유학 준비


 먼저, 왜 유학을 결심했는지 말해야겠다. 나는 원래 유학에 대한 편견이 좋지 않았다. 같은 또래 친구들이 일명 도피 유학을 떠나는 경우를 많이 봐 왔으니까. 그런데 20살 드디어 성인이 되고 기대 속에 맞이한 사회는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약간 눈빛이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뭔가 눈이 반짝반짝했고, 우리는 중요시 여길 수 밖에 없는 하찮은 것들은 그들은 정말로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교집합은 모두 긴 해외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유학, 워킹 홀리데이, 세계여행 등.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이 칙칙한 세상 속에서 그들처럼 반짝이는 눈과 여유로운 사고방식을 지니고 싶었다. 그게 첫번째 이유였다. 물론 그 이유 하나 만으로 결심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기존 대학의 교육에 대한 불만과 더 나은 교육을 위한 욕구, 시야를 넓히고 싶다는 바람, 더 다양한 진로의 폭, 더 넓은 인적 네트워크 구축 등 정말 많은 부수의 이유들이 있었다.


 물론 주변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장기간의 해외경험을 쌓은 사람들은 유학생이었기에, 그리고 타 선택지에 비해 리스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도 유학이라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해외 대학 학사 편입.


 유학이라는 목표를 구체화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목표를 잡고, 약 반 년간을 준비했다. 앞서 말했던 '자금'이라는 지점에서 항상 걸리곤 했지만, 어린 나이였기에 자세한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무지할 터였다. 그래서 되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혼자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때에는 '돈이 없어서 못 간다'는 걱정은 사실상 많이 하지 않았고, 주된 걱정거리는 '부모님이 나의 능력을 믿지 못 해서 안 보내 주시면 어쩌지' 였다. 그래서 나는 그저 명확한 목표 설정과 그에 해당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한 만반의 준비에만 주력했다.





유학원, 부자처럼 보이기 대 작전


12월. 종강. 그리고 대전에 가자마자 부모님께 유학에 대한 PT를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ppt제작에 앞서 더 정확하고 설득한 정보도 필요했다. 정말로 정확한 정보가. 내가 인터넷에서 아무리 열심히 서치한다고 한들 실제 기관에 대하면 턱 없이 부족할 터였다. 유학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유학원, 아 악명 높기로 어찌나 유명한가. 너무 비싸다. 결국  생각해낸 방법은 '유학원에서 상담만 받기'였다. '그래. 상담만 받자. 최대한 금방이라도 등록할 사람처럼 보여서, 많은 정보를 주게끔 유도하자.' 라고 결심했다.


 그런데, 유학원에서 '금방이라도 등록할 것 같은 애'로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가봐도 스무살 언저리로 보이는 여학생이. 부모도 없이. 혼자서 오는데? 누가 애를 믿고 큰 정보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주겠는가. 그래서 나는 '최대한 부자처럼 보이기' 대 작전을 실행했다. 학교 기숙사 옷장에 있는 그나마 고급져 보이는 옷을 갖춰 입고서, 머리를 최대한 단정히 피고, 안 신던 하이힐도 신고. 여느 면접 때 마다 사람 좋아보이는 말투를 연습했던 요령을 살려 부자의 말투를 연습했고, 그 애티튜드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고 귀엽다.


 잘 걷지도 못하는 하이힐로 비틀비틀. 하지만 정신은 똑바로 차리고. 미리 예약해둔 강남의 모 유명 어학원으로 들어갔다. 대리석 바닥위로 튕기는 내 하이힐 굽 소리가 조용한 어학원 내에 울려 퍼졌다. 전초전을 알리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학원 원장과 만나자마자 '부모님도 없이 혼자 온 학생은 내가 처음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대강 부모님이 바쁘셔서 혼자 왔다고 대꾸했다. 그 후로 나는 준비해 온 자료들을 쫙 펼쳐 놓으며 최대한 진중한 말투로. 내가 준비한 이 대학들은 어떤지. 어떠한 이점이 있는지. 더 나은 대안이 있는지. 어떠한 전략을 짜야 하는지. 최대한 캐묻기 시작했다. 원장은 '이렇게 많이 준비 해 온 학생은 처음'이라며 또 한 번 놀라고, 내 기세에 휘둘린 듯 상당히 많은 정보를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명 후 덧붙이던 말, '여기는 학비가 좀 비싼데... 뭐, 물론 부모님이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준비 해 오셨겠죠.'


 그래서? 그 '부자처럼 보이기' 작전은 성공 했는가? 생각 외로 큰 성공을 거뒀다. 정말 뽑을 대로 뽑아먹은 유학 정보와, 학원을 나서려는데 '차 가져 오셨죠? 주차권 필요하세요?' 라고 묻는 원장의 말을 들었다면, 이 정도로도 설명은 충분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부모님께 허락 받기.


 지금 생각하면 순서가 잘못된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시작 단계부터 부모님께 자문을 구했어야 했다. 준비도, 기대도, 노력도 없는 채로 수포로 돌아가는 것 보다 쉬운 절망은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애초부터 내가 일을 벌이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는 분들이셨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하면 분명 지금 학교도 좋은데 왜 그러냐. 그냥 부모님 가까이에서 공부나 해라. 라고 말 할 게 뻔히 보였기 때문에. 그저 내 간절함과 목표의 명확성을 확실히 보여드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때는.


 그 해 가을에 3개월 정도 토론 클럽을 했다. 과거 연예인이자 현직 BBC 기자셨던 분이 이끄는 모임이었는데 굉장히 현명하고 혜안이 있으셔서 많은 자문을 구하고는 했다. 그 분이 말씀하셨던 것 중 가장 인상깊었던 말이, '부모님을 설득할 일이 생기면 무조건 카페로 데려가야 한다. 집에서 말 하면 무조건 소리지르신다. 그런데 카페면 일단 남 시선 의식해야해서 소리도 못 지르시고, 방으로도 못 들어가셔서 일단은 조용히 다 들어 주신다.' 참 인상 깊어서 메모해뒀던 구절인데. 내가 그걸 실제로 쓸 줄이야.


 약 120장. 약 2시간 분량의 PPT를 제작했다. 나의 그 동안의 성과를 나열하고, 나 이렇다. 나 이렇게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왔다. 한국에만 있기에 너무 아까운 인재다. 나 어디 가고싶고, 어떻게 갈 거다. 가서 뭐 할 거다. 등등...을 나열한, 유학 설득 PPT.


학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2시간을 달려 본가인 대전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 거의 3개월 만에 집에 온 딸을 보러 마중 나와주신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는 부모님 차에 타자 마자 말 했다. "집 말고, 바로 집 근처 스타벅스로 가자. 할 말이 있어."


그렇게 도착한 스타벅스. 한적한 2층에 부모님을 앉혀두고, 커피는 내가 사 오겠다며 1층 카운터로 내려왔다.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댔다. 이렇게 떨렸던 적은... 분명 많은 것 같은데, 이건 약간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간신히 커피를 들고 올라가 노트북을 폈다. 아무리 많은 관중들 앞에 서도 절대 떨리지 않아 축제MC는 꼭 도맡아 하던 나였는데 그냥 이 두 사람 앞에서는 목소리가 한 없이 떨렸다. '사실... 유학 가고 싶어. 근데 정말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반 년 동안 준비했어. 지금부터 이 pt 통해서 다 말할게.' 하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PT를 시작했다.


 발표를 이어가던 중, 17살 고등학교 1학년 부터 내가 해 온 성과들을 줄줄이 발표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도 했었다. 그냥 나를 키워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이뤄온 것들을 모두 말 하자니 굉장히 내가 같잖기도 하고, 부모님이 이 만큼 딸을 잘 키웠어요, 뭐 그런 감정들이 서서히 섞여서... 어느 순간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려고 하더라. 신기했다. 하지만 꾹 참고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집 앞 카페에서. 관중은 단 2명인, 2시간 짜리 PT가 끝났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하지만, 이 글의 첫 문단에서도 예측 가능하듯이, 부모님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서 제일 부모님에게 미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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