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Q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nderer Jan 11. 2023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른 선택을 해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형상은 언제나 만족스러울까? 지금 내 모습은 다른 갈림길을 택했던 수많은 다른 나와 비교해서 얼마나 괜찮은 삶인가? 마블에서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등장시켰던 것은 향후 전개될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였지만, 다중우주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영화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제목으로는 전개를 가늠하기조차 어렵고 설명은 최소한으로 줄인 영화다. 그렇지만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감정이 너울너울 파도를 친다. 이 상상력의 폭발은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이끈다.


1. 세탁소

 에블린은 남편인 웨이먼드와 함께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는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세금 처리를 위해 영수증을 들고 직접 국세청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시작했던 세탁소는 다사다난했다. 업장을 운영하며 겪는 사건 사고들은 오전 시간만 하더라도 몇 건씩 발생했다. 세금 처리에 자잘한 실수들도 있었고, 소통을 원활하게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국세청 직원이 깐깐하게 군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화에 드러나진 않지만 이런 과정이 단지 올해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세금 징수는 매년 있는 일이고 올해 무사히 신고를 마치고 나면 내년의 몫이 남아있다. 인생에서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 세금과 죽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세탁소에 맡겨진 옷은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친다. 옷을 맡기고 찾아가는 과정들, 매번 보는 단골의 모습들은 하나같이 반복적이다. 이러한 반복은 지극히 권태롭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매 순간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지만 우린 결코 매일매일이 똑같은 하루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시시때때로 무의식에 스며든다. 변화는 의식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소하고 미세하다. 일상은 감정을 무뎌지게 한다. 가끔은 가족 간의 약속, 기념일, 의미 있고 중요한 대화도 일상에 무너진다. 그러니 가족회의를 소집하는 순간은 대개 정말로 중요한 대화들의 유통기한이 끝난 이후가 된다.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도 그랬다. 크고 작은 오해들은 대화로 풀어낼 타이밍을 놓친 채로 일상 속에 숨겨진다.


2. 새해맞이 기념행사

 세탁소에서는 새해맞이 기념행사를 연다. 가족끼리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을 초대해 다 같이 편하게 노는 자리다. 맛난 음식도 있고 분위기도 좋다. 올해는 세무처리 때문에 예년처럼 즐겁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매년 맞이하는 새해지만 우린 그 반복되는 순간을 기념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해 다시 1년 전의 그 자리로 돌아오면 우리의 삶도 다시 시작된다. 다시금 생일을 기다리고, 공휴일을 기대하고, 작심하고 3일을 버텨낼 의지를 얻는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이 우리의 일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한히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인위적으로 반복되는 주기를 적어두는 것은 철저히 인간을 위한 일이다. 인간은 무한함을 견딜 수 없으니까.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어도 남은 삶이 유한하기에 우린 지금 이 날들을 기념해야만 한다.


 기념일은 표지판 같은 역할이다. 올해는 얼마나 남았는지 돌아보고 무엇을 해왔는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일상 속에 남겨진 날들에 의미를 덧붙이려는 노력은 그간의 과정에 대한 축하인 셈이다. 기념일의 좋은 점은 딱히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해내지 않더라도 날짜가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냥 그 시간에 그때에 있었기 때문에 기념일을 맞는다. 매년 반복되는 삶 속에서 권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행히도 1월 1일에는 결심을 불태울 의지 또한 충전된다. 변화를 만들어낼 의지를 사랑하고 긍정해야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꼭 인간만의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식이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3. 웨이먼드와 에블린

 거대한 악에 맞서기 위한 선함은 물리력이 내포된 수단이 아닌 친절한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몰라서 지나치게 가혹해질 때가 있으니까. 싸움이 발생하는 와중에 혼란스러워하는 웨이먼드는 간절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외친다. 우리가 더 다정해져야 한다고 간절하게 소리친다. 내내 철없는 것처럼 굴었던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상황을 바꿔낸다. 몇 마디 진솔한 설명과 약간의 호의를 통해 마술처럼 분위기가 바뀐다. 웨이먼드는 특히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혼란스러울 때는 다정해지라는 이야기를 건넨다. 아주 사소한 일상 속의 웃음, 실없는 장난들과 대화. 애정이 만들어내는 관심은 세계를 바꾼다. 다정함에는 그런 힘이 있고 다른 세계의 웨이먼드는 그걸 '전략적 친절함'이라 말한다. 무언가를 무작정 교정하거나 구제하려는 시도보다 애정 어린 관찰과 소통이 해결에 적합할 때가 있다는 이야기다.


 조부 투바키는 그런 일순간의 감정을 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전지전능한 위치에서 얻어낸 세계의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주변 어느 것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극심하게 고통받았다. 가장 유능했기 때문에 한계를 넘어서게끔 자극하고 몰아붙였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에블린이 했던 말과 행동은 그녀를 위로한다. 이 세계의 딸이든 다른 세계의 거대한 악당 조부 투파키든. 궁극적인 공허와 허무를 이야기한들 크게 상관없었다.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여기 있고 싶다'는 답이면 충분했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매거진의 이전글 잘 쓴 이야기의 여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