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사실, 성수기 전으로 아내와 휴가 날짜를 정하면서 가능한 시점이 그때밖에 없었다. 일정을 확정한 후에도 아내와 난 보통 장마는 6월 말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깡그리 잊고 있었다. 장마라는 단어가 사전에도 머릿속에도 없는 단어처럼 여겼달까.
그렇게 6월 마지막 주 여행 계획은 별 문제가 없는 듯했다. 적어도 누나가 장마인데 괜찮겠냐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 그랬다. 우리는 장마가 시작되는 그때 비가 많이 오는 제주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어쩌랴. 낙장불입. 휴가를 바꿀 수도 없는 법. 여행마다 날씨 운이 좋은 편이라 자부했던 터라 이번에도 그러기를 조심스레 기대하는 수밖에 딱히 할 것은 없었다.
일요일 제주에 도착했다. 비는 오지 않았고, 멀리 보이는 한라산을 에워싸듯 회색빛 비 구름이 펼쳐져 있다. 강렬한 햇빛이 잠깐씩 쨍하며 나타나기는 했지만, 해가 구름에 가려 그리 덥지 않다. 늦은 도착으로 체크인 후 바로 예약했던 가게로 향했다.
일명 다이닝 레스토랑. 순전히 숙소와 가까운 곳에서 매번 똑같은 메뉴 말고 아내가 좋아하는 와인과 함께 분위기도 내 볼 겸 즉흥적으로 고른 곳이다. 다이닝이라 하면, 파인 다이닝 (fine dining)을 짧게 줄인 것으로 말 그대로 좋은, 질 높은 정찬이라는 말이다. 자본주의적 표현을 빌라 지면 비싼 저녁 식사랄까.
그러나, 이곳의 가격은 55,000원. 다이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저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점도 좋았다. 사실, 첫날 호텔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 선택의 중요 요소였다. 어쨌든, 첫날은 으레 제주에 왔으니 하며 떠오르는 메뉴를 피할 요량을 더해 선택했던 곳. 레스토랑의 이름은 '더 쉐드'.
그리 크지 않은 매장. 창고라는 뜻 마냥 노출 콘크리트로 인테리어도 심플하다. 예약시간보다 30분을 앞 당겨서 인지 손님이 없어 약간의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오히려 셰프님으로부터 원 테이블 식당에 온듯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 완선 고급스러운 다이닝에 온 기분이었다.
5개의 추천 와인
추천해 주는 와인에 대한 설명이 예사롭지 않다. 듣는 사람까지 마치 전문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해 주는 마법을 선보이며 5개의 와인을 추천해 주었다.
와인 사 먹느냐고 돈을 모으지 못한다는 셰프님의 농담에 우리는 적정한 가격 기준과 드라이한 와인으로 선택. 와인 초이스가 끝난 후, 그에 걸맞은 지허 와인잔(부르고뉴)을 내주셨다. 내주는 잔부터가 고급지다.*
그리고 이어지는 코스요리. 그중 인상적인 세 장면.
첫 번째 스타터로 나온 식전 빵과 노리 츠쿠다니 버터.
노리 츠쿠다니 버터라니 이름은 매우 낯설지만 맛은 친숙하면서 빵에 발라먹는 버터로 응용한 버전이 처음부터 앞으로 나올 요리를 기대하라는 듯한 맛을 선사한다. (노리는 김, 츠쿠다니는 간장, 설탕 등을 넣어 조린 것을 의미한다.)
빵에 바른 노리 츠쿠다니 버터
두 번째 수비드 한 오리, 그리고 열무와 후추소스
오리 고기 숙성을 다른 때에 비해 길게 하지 못했다고는 설명해주긴 했지만, 숙성을 해서인지 확실히 더 부드럽다. 그리고 가니쉬로 나온 열무. 가니쉬에 열무라니 꽤 낯설지만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완벽한 짝으로 엮어주는 후추소스. 그동안 후추라는 향신료에 크게 감동한 적이 딱히 없었다.
통후추 소스가 올라간 오리 가슴살
부드러운 오리고기와 적당히 단단함의 통후추를 씹어 깨 먹는 맛이 자극적이다. 입안에 전해지는 짜릿한 통각이란. 틀에 박힌 표현이지만, 후추의 재발견이 따로 없다. 3대 향신료(후추, 계피, 정향)에 하나라는 사실에 의아함이 있었는데, 그런 편견이 싹 사라져 버렸다.
세 번째 본메로우**를 곁들인 안심 스테이크. 문어, 오리고기를 먹고 메인으로 안심 스테이크가 나오는 55,000원의 다이닝이라니. 고기의 양과 굽기 부드러움 모두가 기대 이상이다. 거기에 본메로우를 곁들여 먹으니 흡사 고기 버터를 발라 먹는 것 같이 입에서 녹진하게 녹아내린다. 제주 여행의 첫 메뉴부터 흡족하기 그지없다.
안심 스테이크 & 본메로우
낯섦을 마주하기 위해 떠나온 여행, 의외의 선택과 마주하는 것이 여행을 더 여행답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제주로 여행을 오는 다음 그 언제가. 그때는 오늘의 낯섦과 만족을 기억하며 더 쉐드를 아내와 함께 다시 찾으리라.
내륙은 비가 엄청 쏟아져 수도권의 중고차 시장이 침수되었고, 일부 지하철 역이 물에 잠겨 출근하는데 힘들었다는 소식이 들렸왔다. 그랬다. 제주는 비가 스치듯 잠시 내리긴 했지만, 여행하기에는 괜찮았다. 흐린 날씨로 파란하늘은 보지 못했지만 반대로 덜 덥고 좋았다. 장마철 제주를 찾았는데 우비를 입은 날은 셋째 날 하루 정도였으니. 이번에도 날씨 운이 있었다라 할만했고, 매일 같이 장마를 뚫고 출근하지 않았으니 상대적 만족감이 급상승했다.
먹으러 여행을 온 것인지 착각이 들 정도로 일주일 동안 제주의 맛있는 음식과 함께했다. 급격하게 살이 불었지만, 역시 휴가는 이래야 맛이다.
* 여행에 돌아와 아내는 이미 지허 와인잔을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단다. 다소 가격이 있는 덕에, 아직 구매는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조만간 구매 버튼을 누르지 않을까 싶다.
** 본메로우 (bone marrow)’는 소의 골수라고 한다. 뼈 안에 있는 골수를 안심과 같이 곁들여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