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모두에게 중요한 일

by 초생달

해가 지날수록 시시해진다. 기념일이나 특별하다고 여겨지던 날들이.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 누군가에게 이날은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하는 날, 케이크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날일 테지. 내겐 업무를 하지 않는 날 중 하루이다. 밥을 먹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빨래하고 이런저런 음악이나 유튜브 영상을 봤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들여다보기도, 비극적인 소식을 듣기도 했다. 케이팝 관련 평론을 하던 모 음악평론가가 수면 중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남긴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추천곡을 들어봤다. 새로운 발견이라 할 만큼 좋았고, 나는 그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암이나 질병, 사고로 죽는 것보다는 잠든 상태에서 가는 게 제일 낫다고 생각한 때도 있다. 하지만 40대, 한창 활동할 나이에 그렇게 가는 건 또 다른 문제가 아닐까. 인생이란 이토록 하찮은 것인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원히 잠들어도 행복한 마무리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두 죽는 건 당연하지만, 대부분의 죽음이 당연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내게 죽음은 무조건 슬픈 비극이다. 즐거운 죽음이니 멋진 마무리 따위가 대체 무슨 말이야. 나는 언제나 ‘나’로 살고 있는데, 그런 ‘나’가 이제 더 이상 ‘나’일 수는 없는 거잖아. 네가 ‘내 죽음’이 멋지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나. 그걸 왜 긍정적으로 감싸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평생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겠으나 ‘온전히 이해한다’라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당장 내가 배부르고 편한데 다른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비극에 놓인 사람이라면 더욱 어렵다. 자신의 어둠에 갇힌 사람들은 남의 사정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여튼 ‘나의 죽음’을 다른 누군가가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온전히 자신뿐이다. 그러니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온전한 이해도 함께 사라진다. 유명인들의 평전이나 전기를 본다 한들 그게 그 유명인의 백 퍼센트 본심일 리 없다. 제삼자의 시선에서 본 감상은 될 수 있지만. 그래서 죽음은 내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직도 할머니나 삼촌 등 사랑했던 지인의 죽음을 떠올리는 게 두렵다. 단편적이나마 좋았던 기억들이 있다. 그건 오로지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것일 테다. 그게 온전한 이해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오해가 있을지라도(정말 심각한 왜곡이면 문제가 되지만) 남겨진 이들은 그걸로 위안을 삼는다. 물론 그게 진짜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죽기 전에 기념이 될 만한 글이나 기념물을 만들어두면 의미는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기념물을 만들어놓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의 삶이 별것 아닌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잘 태어나 잘 살았다는 것이 아닐까. 거기서 뭘 얻었든, 얻지 못했든 간에 하나의 생명으로서 무사히 살아왔다면 충분히 잘된 것이라 믿는다. 다른 누군가가 인정하고 안 하고는 그다음 문제다.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기도 하고. 당신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잘 모른다. 몇 권의 책과 영상으로 당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수고하셨노라는 말을 전한다. 아쉬움이 없진 않겠으나 스스로를 믿고 살아왔다면 충분히 성공한 인생이었을 테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성공한 인생’이라는 단어에 집착한 것은 아닐까. 성공하지 못하면 또 어떤가. 모두의 인생은 단 한 번이고, 모두 중요한 가치를 품고 있다. 그걸 언제 발견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명복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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