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의 시대

by 초생달

요즘 나는 항상 부족하다고 느낀다. 월급은 예전보다 조금 올랐고, 복지나 전반적인 상황도 과거보단 더 낫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무언가 함께 힘을 뭉쳐서 돌파해야 할 때가 있다. 매년 연말과 연초면 돌아오는 중요한 입찰 경쟁이 특히 그렇다. 물론 이 시기에는 업무량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회사의 1년 농사가 이때 결정되는데 대충 할 수는 없다. 당연히 매번 최선을 다해 기획하고 디자인해야 한다. 요즘에는 그게 안 되는 것 같다. 직장 상사들도 직원들 눈치를 보고, 직원들은 워라벨과 합리적인 근무시간을 외치며 입찰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부족한 게 있으면 누구든 이야기해서 지적해야 한다. 더 나은 기획과 디자인을 뽑아내기 위해 서로 다투고 싸워야 한다. 나라고 싸움을 좋아할 리 없지만, 그게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요즘에는 그게 쉽지 않다. 모든 게 적당하다. 열정은 구시대의 언어가 됐다. 지금은 모든 게 합리적이다.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기획이나 디자인이 별로여도 그냥 적당한 선에서 넘어간다. 디자인이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당연히 따져 물어야 한다. 싸워서라도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 서로 눈치만 본다. 그러니까 더 나은 작업물이 나올 리 없다. 시작할 때부터 결과가 훤히 보인다고 해야 하나.


바야흐로 ‘쿨함’의 시대다. 모든 게 뜨겁게 타올랐다가 금세 식어버리는 한국인의 특성과는 안 맞는 것 같은데, 업무에서만큼은 쿨한 척한다. 투쟁이나 고통 없이는 성장도 없다. 투쟁과 고통을 피하고 있으니 당연히 성장할 리 없다. 많은 업체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뛰어든다. 엇비슷하게 생각하고 기획하고 움직이면 남들과 비슷하거나 떨어진다. 남들과 비슷하거나 떨어지면 당연히 원하는 일을 따낼 수 없다. 나는 속으로 ‘열정이 필요해’라고 외치지만, 입 밖에 꺼낼 수는 없다.


지금은 바야흐로 쿨함의 시대이니까. 아무리 업무 결과가 부족해도 퇴근시간이 되면 칼같이 퇴근해야 하고, 번번이 떨어져도 누구 하나 슬프다는 기색은 없다. 쿨해야 하니까. 내 생각에는 가끔 싸우는 일도 필요하다. 그게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나도 싸우는 건 싫으니까. 하지만 그런 갈등과 소통을 겪어야만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a와 b가 만나 c가 되는 것은 자동 공식이 아니다. c가 나오기까지는 까마득한 노력과 투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안 될 수도 있다. 열정이 있다고 잘된다는 법칙은 없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느낌이 든다면 최소한 후회는 없지 않을까. 내 안에 모든 걸 다 쏟아낸다면, 온전히 소진했다면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나도 일찍 퇴근해 놀고 싶다. 야근하는 건 무척 싫고, 집에서 멍하니 누워 있는 게 제일 행복하다. 하지만 내 일상이 지금처럼 유지되려면, 불안해지지 않으려면 이를 악물어야 할 때가 있다. 혼자서 악무는 것보다는 함께 악무는 게 낫다. 쿨해야 할 때가 있고, 뜨거워야 할 때가 있다. 40대 접어들며 문득 나는 업무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그전에는 내 안에 없던 감정이다. 계속하던 일이니까 이왕이면 잘하고 싶다.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고치고 수정하고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열정이 생기고 보니 벌써 내 또래는 제2의 인생을 고민하는 때가 됐다. 벌써 명예퇴직을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제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하나. 40대면 퇴물인데 다른 직장에서는 날 받아줄까. 그렇다면 창업인가? 나 같은 성격으로 장사를 할 수 있을까. 뒤늦게 불이 붙었는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냄비에는 특색 없는 물만 담겨 있다. 양념도, 재료도 없는 채로 계속 불은 타오르고 물은 끓고. 그렇게 시간은 빠른 보폭으로 도망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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