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던가, 마스크를 쓰고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먼저 그 안에 있던 부부 중 남편이 투덜거리듯 아내에게 말했다. 마스크 해제된 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저래? 순간 움찔해 남편을 쳐다보니 그의 아내가 남편에게 눈치를 줬고, 그는 이윽고 내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마스크를 벗을 자유가 있듯, 내게는 마스크를 쓸 자유가 있단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2020년부터 최근 몇 년간 마스크를 몸의 일부분처럼 쓰고 다녔는데, 이제는 마스크를 쓰고 외출하면 으레 주변을 의식한다. 과도기인지 출퇴근 전동차 안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과 벗은 사람이 뒤섞여 있다. 누군가는 유난 떤다고 뭐라 할지도 모른다. 마스크 없이도 미세먼지 가득한 봄을 잘 이겨냈다고 말이다.
밖에서 아직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백일장에서 상 타는 게 재미있고 어디서든 돋보이고 싶던 중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이후 대학교 때는 어떻게든 눈에 띄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될 줄 알았고,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보니 나는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에 비해 열등하고 뒤떨어지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왜 나는 신문기사나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직장인 평균 연봉보다 낮은 연봉을 받는 걸까, 드라마나 영화 속 편집자들은 자신감 있고 멋지게 일을 추진하던데 나는 왜 그렇게 실수가 많고 혼만 나는 걸까. 주변 눈치를 많이 보고 비교하는 데 익숙했던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평균 이하의 인간’이라 규정지었다. 그러니까 그 생각대로면 난 뭘 해도 풀리는 게 없는 인간이었다. 억눌린 분노는 으레 다른 곳에서 맥락 없이 폭발했다.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누가 내 어깨를 건드리기만 해도 불같이 화를 내며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뭐야, 한번 해보자는 거야? 밖으로 나와. 집 밖에서 누가 시끄럽게 떠들어도 바로 응대했다. 조용히 해, 이 XX야! 뭐, 너 거기 서 있어. 내가 사는 곳 근처에서 교복 입고 담배 태우는 청소년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니들 거기 딱 서 있어. 가만 안 둘 거니까. 싸움을 해본 적도 없고 운동신경이 둔한 데도 나는 남들에게 지는 게 싫어서, 약해 보이는 게 싫어서 매일 그렇게 남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경찰서에 갈 정도로 사고를 친 적은 없으나 작은 분란은 끊이질 않았다.
피곤한 인생이었다. 그렇게 싸운다고 뭔가를 얻는 것은 없었다. 딱히 영웅이 되지도 않았다. 열등감이 채워지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를 더욱 굶주리게 했다. 화를 내면 낼수록 나는 더 많이 화를 냈고, 다른 사람들을 더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저래서 마음에 안 들어, 이 사람은 이래서 마음에 안 드네. 불만은 더욱 쌓이고, 나는 더더욱 구석으로 몰렸다.
구석에 몰린 나는 ‘나’ 자신을 이 세계에서 지워낼 수는 없을지 상상했다. 마스크는 그런 내 생각에 날개를 달아줬다. 모두가 마스크를 쓴 팬데믹 환경 속에서 나는 조용히 묻힐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아서 행복했다. 마스크를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더 이상 예전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치고 지나가거나 뭐라고 한마디 던져도 씩 웃거나 그냥 지나쳤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차츰 내가 이 세계,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도 변했다. 마스크를 썼든 아니든 그들에게 나와 같은 사연이나 고민이 있겠지, 우린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사는 시시포스들이니까.
스스로를 감추고 지워내면서 도리어 나를 되찾고, 이 세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암흑 속 외로운 얼룩일 뿐이다. 이 광활한 어둠 속의 다른 어딘가에 우리를 구해줄 무언가가 과연 있을까. 사진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까?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우리의 오만함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칼 세이건의 책 <창백한 푸른 점> 도입부에는 64억 킬로미터 밖에서 촬영한 지구의 사진이 실려 있다. 태양 반사광 속에 있는, 파란색 동그라미 속 희미한 점이 지구이다. 내가 이 세계에서 희미하게 존재하려 애쓰듯, 지구도 광활하다 못해 무한한 우주에서는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희미하게 존재한다. ‘외로운 얼룩’처럼 살아남은 지구, 그리고 그 안에는 ‘외로운 얼룩’처럼 살아가는 내가 있다. 나는 희미하기에 이곳저곳의 손짓과 마주할 수밖에. 희미한 존재들이 살아남으려면 결국 서로를 믿는 수밖에.
그러니까 마스크는 내게 존재를 일깨워주는 나침반이다. 나를 숨기고 지워내며 얻어내는 겸손과 따뜻한 사랑으로 나는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견뎌낸다. 창백한 푸른 점처럼. 외로운 얼룩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더욱 빛나는 주말의 어느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