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일을 하다 보면 인간관계에서처럼 얕고 넓은 지식들을 무작위로 습득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디서 만난 누구더라,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모르는 용어나 개념들. 그중에 하나로 애착 이론과 애착 대상이란 말이 있다. 아마도 심리학을 공부하던 선배에게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우리의 인간관계는 어릴 적 하나쯤 가지고 있던 애착 인형과의 관계와 비슷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대상에게 애착을 느끼고, 그 대상과 떨어졌을 때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 대상은 사람 혹은 사물일 수도 있는데 환경이 변함에 따라 그 대상도 달라진다. 내 경우는 그 대상이 인형이 아니라 발에 붙어 다니던 축구공이었던 것 같기도, 초등학교 때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빨간 줄무늬 티셔츠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축구공이 터져버리거나 엄마가 티셔츠가 다 해졌다며 버렸을 때 그렇게 울었을까? 새로 산 축구공은 발에 착 감기는 느낌이 뭔가 예전만 못하고, 새 옷은 남의 옷 같기만 했다. 연예인을 동경하고 좋아했던 감정도 다 그들이 애착 대상이라서가 아니었나 싶다. 갑자기 모든 게 단절된 채 다른 세상에 던져진 군대에선 하다못해 고무링 하나도 유독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었는데 그게 내 발목을 감쌀 때 느끼는 안정감은 ‘화려한 조명’ 부럽지 않았다. 부모에서 인형으로, 인형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연인으로, 배우자에서 자녀로 애착 대상은 점점 변하게 되는 걸까? 생각해 보니 그 대상이 바뀔 때마다 심한 몸살을 앓듯 몸이나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그러니 새로 바뀐 애착 대상에 자꾸 집착을 하게 될 수밖에.
우린 어쩌면 사랑이란 말로 포장된 애착 대상을 찾아 해매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처럼 ‘덕질’이란 말이 아무데나 붙는 게 아니던 시절, 찐 오타쿠인 친구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일본어과여서 반에 오타쿠들 천지였는데, 그 친구들은 연애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외로울 틈이 없었다. 완전한 애착 대상을 찾았기 때문 아니었을까? 심지어 애착 대상이 늙거나 변하지도 않는 애니메이션 속의 모습이었으니까. 곁에 화면 속 모습을 그대로 본딴 피규어가 있는데 더 이상 안정감을 찾아 또 다른 모험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그 모험은 절대 반지를 찾아 떠나는 프로도의 여정처럼 거절과 배신, 오해와 불신이라는 험난한 산을 넘을 넘어야 하는 성가신 일이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골룸의 애착 대상도 결국은 반지였구나! 갈등의 모든 이유를 애착 이론에 갖다 붙이면 설명이 되는 매직. 놀랍지 않은가?
갖다 붙이고 보니 이렇게도 설명이 된다. 결혼이란 제도 자체가 인간이 애착 대상으로부터 격리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배우자에서 자식으로, 또 그 자식의 자식으로. 내 자식보다 손주가 더 예쁘단 말이 그 이유에서 나온 걸까? 내 아들을 뺏어간 며느리가 미운 이유도? 하다못해 잘못을 저지른 내 새끼마저 감싸는 부모의 심리까지도? 「사랑의 스튜디오」와 「하트 시그널」이 결국 애착 대상 쟁탈전이었단 말인가? 비약은 여기까지! 혼자 세운 가설이 맞는지 아닌지는 이제 관련 서적을 찾아 공부를 해봐야겠다. 어릴 때 공부란 걸 이만큼 해보고 싶었어도 참 좋았을 텐데.
** 독립출판으로 발행 이후 정식 출간된 에세이 <저 결혼을 어떻게 말리지?>의 일부 에피소드를 브런치에 올려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