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새로운 챕터
한 달하고 3주만에 상담을 다녀왔다. 작년 9월 퇴사할 무렵부터 1-2주 간격으로 진행해오던 유일한 정기적 스케쥴이었다. 집중해서 준비해야 할 일정이 생겼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잠시 상담을 중단했던 건 그 공간 자체가 애써 잊고있는 기억들을 상기시킬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죄 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기관. 내가 심리상담을 받고있는 장소의 정식 명칭이다.
작년 9월 나는 나에게 일어났던 '사건'으로 인해
내가 '강력 범죄'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여전히 얼떨떨한 채,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시간동안 이 위치를 벗어날 수 없을 지 모른다는 예감에 울컥하면서,
차갑게 진행되는 수사 진행 과정을 겪으며 조금 외로운 마음으로 그 곳을 찾았던 것 같다.
처음에 나는 놀라울 정도로 괜찮았다.
긴 여행, 짧은 여행을 다니면서 보고싶은 얼굴들을 만나고 열심히 떠들고 많이 읽고 잠도 많이 잤다. 잘먹고 잘쉬면서 건강하게 회복하면, 금방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강력 범죄로 분류되는 일에 퇴사까지 감행하게 되었으면서 잠깐의 방황을 마친 사람처럼 훌훌 털고 씩씩해진 나를 스스로 대견히 여기기도 했다. 큰 기대없이 첫 상담을 진행했을 때 내 상태를 진단하는 그 표현을 듣기 전까지는 나도 내가 괜찮은 줄 알았던 것 같다.
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달리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사건이 발생하고 고소를 결심하고 퇴사 후 소송을 진행하면서 처음 나를 울게 했던 말인 것 같다.
고소장을 접수하던 날 3시간동안 사건 당일을 회고하며 진술할 때도, 가해자 변호사에게 연락받았을 때도, 담당 수사관의 비협조적인 수사 방식이 나를 억울하게 했을 때도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았었는데.
그동안 아무도 나에게 뛰라고 한적은 없지만 모두가 나한테 쓰러져있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뼈가 부러진 상태라는 말이 나를 토하듯이 울게 만들었다.
상담 회기를 거듭하면서 천천히 분노가 식고 사건의 무게에 짓눌리던 일상이 살아났다.
첫 상담에서 최종적인 목표로 두었던 '사건'의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하기로 했던 것에 가까워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점 사건과 연관되지 않은 일상적인 고민상담을 하고 있다고 느낀 이후로는 상담을 중단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옅어져가고 있는 사건을 상기시키는데 이 이상 이 센터를 찾는 것이 내게 큰 도움이 될까?
한 달만에 센터를 찾으면서도 나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몰랐다. 오랜만에 보는 선생님과 그 간의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생경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EMDR 이라는 기억 재처리 치료 과정을 거칠 때는 사건을 기억해내는 것이 도무지 힘들어 치료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었다.
그런 모든 시간들이 이제는 애틋하게 남아있다. 괜찮아지기 위해서 몸부림치던 나날들.
뼈를 굳히기 위해 멈춰있어야만 했던 순간들이 안쓰럽지만 장하게 느껴진다.
이건 마치,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며 울고 있는 사람에게 공감하며 눈물 짓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다. '지나 간' 감정이지만 '알고 있는', 나 또한 '겪었던' 일에 대한 '기억'만 남아있는 것이다.
사건이 나에게 정말 재처리 되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지난 가을부터 나를 거슬리게 했던 못이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엄청난 해방감이었다. 건물을 나오고 나니 햇빛에 비춰진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자기의 색을 드러내는 것들이 또렷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