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것이 떡볶이는 아닐지라도
아내가 아이를 재우러 들어간 사이, 난 주섬주섬 거실에 널브러진 전투의 잔해를 치우고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이스크림 모형, 자석이 붙은 숫자, 어느덧 포도(아이의 태명이 포도였다) 것이 되어버린 아내의 알 큰 선글라스..
절반쯔음 치우고 나서 홈캠을 틀어 방에서 치러지고 있는 최후 전투의 전황을 살핀다. 음 아직 승전보를 울리기에는 이른 것 같다.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나에게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지만 잠시 힘든 몸을 소파에 뉘인다. 또다시 일어나 주섬주섬 집안일을 처리하다 보면 어느덧 시끄럽던 전투 소리가 사그라든다. 오늘도 역시 승리했다는 뜻이다.
같이 잠들었다 깬 듯, 애기방에서 나오는 아내의 모습이 상상 속의 개선장군과는 다르지만 내가 아는 그 어떤 장군보다 명장이고, 대단한 전략가이다.
“호랑이 왔어..! 얼른 눈 꼭 감아!” 어두컴컴 해진 밤 어흥 호랑이가 찾아온다는 호환 전략으로 승리를 거둔 승장은 잠시 힘든 몸을 소파에 뉘인다.
“배고프다, 자기 밥은 먹고 퇴근했어?“
“아니,, 나도 못 먹었어.. 뭐 먹을까? 시켜 먹을까?, 근데 사실 나 먹고 싶은 거 있어..“
“뭔데?? 말해봐?? 설마?? 떡볶이??”
(떡볶이가 먹고 싶었든, 아니든 메뉴는 결정된 것이다)
오늘의 메뉴 떡볶이. 사실 맵찔이인 나는 떡볶이를, 특히 매운맛 떡볶이를 잘 못 먹었었는데 와이프와 함께 매운맛에 도전하며 조금은 맵찔이를 탈출했다.
엽떡에 허니콤보일 것인지, 청년다방에 돈가스를 추가할 것인지, 아니면 로제 배떡이나 응급실 떡볶이에 도전할 것인지.. 주식을 샀어도 이렇게 샀으면 내 주식 상황이 이렇지는 않을 텐데 싶을 정도로 긴 고민 끝에, 청년다방 매운맛에 돈가스를 추가한다.
배달이 오기 전까지 밀린 집안일을 후다닥 해치우고, 샤워까지 마쳤다. 맨날 욕하면서도 왜 보게 되는지 모르는 막장 드라마 한 편을 켜놓고, 떡볶이를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매워 근데 너무 맛있다..ㅠㅠ”
오늘도 맵다며 씩-씩 거릴 우리지만, 비록 다음날 아이를 보며 참다 참다못해 ”자기야 진짜 미안한데, 나 화장실 좀..“ 하며 힘들어할 우리지만 이 떢볶이는 포기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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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를 만나고 나서 이전처럼 단 둘이 오붓하게 먹는 식사 자리는 거의 사라졌다. 특별한 기념일에 겨우 휴가를 써 포도가 어린이집에 간 사이 갖는 시간이 아니고서야 집안에서, 그것도 대낮에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이렇게 육퇴 후에 마주 앉아 보고 싶은 드라마를 켜놓고 맛있게 매운 떡볶이를 먹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떡볶이만큼이나 맵고, 달고, 짠 오늘의 일상 얘기 보따리를 들고 와 풀어놓는 이 시간이 참 좋다.
떡볶이나 치킨, 돼지껍데기, 이런 야식들이 어쩌면 우리에겐 핑계가 아닐까? 아이에게 온전히 사랑을 주느라 서로 신경 쓰지 못했던 서로를 잠시나마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위한..
“자기야 오늘 저녁은 엽떡에 허니콤보 어때?!?”
추신. 엽떡에 허니콤보는 핑계가 아닐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