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지켜본 기획에 대한 고찰
디자이너로 한 우물만 판지 어언 10년 차네요.
저는 주로 기획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어요. 그것도 업에 통달한 지략가들과요. 그들은 밥 먹듯이 툭하면 입찰경쟁을 벌여요. 서로 뺏고 뺏기는 일의 연속이죠. 치열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한데, 이 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일단 제 이야기를 더 들어보세요.
저는 제안서와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디자인을 합니다. 주로 사용하는 툴은 디자이너답지 않게 MS파워포인트예요. 예, 바로 제 밥줄입니다. 보통의 결과물은 .pptx형식의 파일이지만, 이 외에도 제안을 위해 필요한 (잡다한) 모든 것을 디자인해요. 바인더, 박스, 브로슈어, 리플릿, 포스터... 등.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물으신다면, 그럴 수가 있더라구요.
사업부 내 50여 명의 기획자(=영업사원)들은 다양한 고객을 대상으로 매번 다른 콘셉트와 전략을 구상했어요. 저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구현할 단 한 명뿐인 디자이너였구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또 물으신다면, 사람이 급하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구요. (허허허) 저도 가끔 제가 신기해요. 돌이켜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참 많았거든요. 모든 수정과 완성은 ASAP가 디폴트였고 성수기에는 '공장모드'로, 제안서 템플릿과 컨셉 BI들을 하루에도 몇 개씩 찍어내기도 했거든요. 대단한 10년이었어요. (절레절레)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가 오랫동안 이 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선택과 집중이었어요. 일의 경중에 따라 페이스를 조절했고 지속 가능한 상태를 유지했던 것이 바로 지금의 저를 있게 했어요. 평소엔 퇴근요정이지만 굵직한 타깃이 등장하면 머리를 맞대고 새벽까지 열정을 쏟아붓는 일귀신이 되었던 거죠. 성과는 성과대로, 또 제 삶은 삶대로 적절히 균형을 맞춰온 것이 그 비결인 것 같아요.
요즘에도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이 하기'를 실천하고자 매일 잔머리를 굴리며 업무의 효율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궁리합니다.
이런 저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디자이너로서 일했던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대충이란 없었고, 언제나 저의 목표는 '우리 회사의 수주'였으며 그 목표를 위해 늘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요.
저는 운이 참 좋았어요. 기업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로서 조직의 시스템과 체계 안에서 비교적 많은 자유를 누렸고,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봤거든요. 어쩌면 밖에서는 절대 경험해보지 못할, 기회조차 갖기 어려운 수많은 프로젝트에 당연하게 참여했죠. 저의 곁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추진력과 열정, 에너지를 가진 동료들이 있었고, 반박할 수 없는 깜(동사형으로는 '까다')을 통해 끊임없이 조직을 성장시킨 리더가 있었어요. 그들과 함께 한 그 치열한 10년은 제 인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한 행운이었어요. (그 운을 다 쓰고 지금 이 모양 이 꼴은 아니겠ㅈ)
과거의 저는 혹시 내가 고여도 너무 고인건 아닐지, 누군가는 젊고 새로운 감각의 디자이너를 원하고 있지 않을지, 언젠가 프리랜서가 됐을 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곤 했었죠.
하지만 지난 10년간 고강도 트레이닝을 받아온 지금의 저는 완벽하게 고였고 저만의 웅덩이가 생겼어요. 눈으로 보이는 화려한 디자인이 아닌 자료를 구조화하는 디자인 기획 능력을 쌓았고, 나의 커리어를 펼치는 데 있어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이런 저를 만든 건 저를 거쳐간 수많은 기획자들이었어요. 그들을 지켜보며 그들의 장점을 흡수하고 단점을 새겨두었죠.
그들은 수주라는 목표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리는 경주마였어요. 이렇게까지? 싶은 열정과 에너지가 넘쳐났어요. 파워포인트와 씨름하며 자료를 뒤집고 엎고 울고 불며 매일 밤을 지새우는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그 자체만으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었어요. 기가 쭉쭉 빨렸죠.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이래요. 한번 상상해 보자구요.
오늘은 즐거운 월요일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매출 100억이 걸린 입찰 경쟁 PT를 앞두고 있죠. 당장 이번 주 금요일에요.(HOOK!)
일단 이것만 수주하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의 목표까지 200% 달성이 되는 상황이에요. 회사 경영진들도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움직였대요. 뭘 어떻게 움직이는지 나 같은 소사원은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경쟁사에서는 몇 달 전부터 TFT를 만들어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다네요. 너무 부담이 되지만, 이거 실패하면 내 미래도 없다. 뭐 이런 각오로 열심히 해보려고 해요. 사실 회사는 둘째치고 이건 내 인생을 탈탈 털어도 또 올까 말까 한 천금 같은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참, 잊을 뻔했네요. 1차 PT자료 보고는 내일 모레랍니다.
여러분은 이제 막 제안서를 제출하고 사무실로 돌아온 상황이에요. 전날 밤을 꼴딱 새우고, 잠 한숨 못 잤지만 사실 피곤한 것도 모르겠고 막막한 기분이죠. 한 시간 뒤에 팀 회의를 하기로 했는데 뭐라도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일단 (의식이 이끄는 대로) 파워포인트를 더블클릭합니다.
모두가 잘 아는 하얀 페이지가 눈앞에 떴을 때. 여러분의 기분은 어떨까요. 어떤 생각이 들까요. 많은 일들이 하나의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갈 거예요. (보통 죽기 직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다죠.)
입찰 공고가 뜬 날, 설레는 마음으로 RFP를 출력하던 그때부터
얼마나 열심히 분석했는지 이제 고객이 난지 내가 고객인지 헷갈리는 수준에
쏟아지는 아무 말 대잔치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린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제안서_ver1.ppt”부터 “제안서_진짜진짜찐최최최최종_ver15_제발_출력용.ppt”에 오기까지.
매일 밤 사무실을 밝히며 시켜먹은 치킨만 해도 수십 마리.
이제 남은 건 최종PT예요. 남은 에너지를 끓어 모아 원기옥을 쏘아 올려야 할 때가 왔어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10분. 내 손에 든 이 100장의 제안서를 어떻게 뜯어고쳐야 할까요.
하.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담당자, 기획자, 막내들의 고생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한번 더 이야기 하지만 저는 그 안쓰럽고 대단한 광경을 10년을 지켜봤어요. 불리한 상황 속에서 당사만의 전략을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료를 뒤엎어야 하는 순간에도 방향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뚝심, 안 된다고 하는데도 해내고야 마는 기적 같은 일들을요.
이제 그들, 그리고 업계의 경쟁사를 비롯한 모든 고객에게까지 돌려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저에게는 어마어마하게 쌓아온 경험이 있고, 기획과 제안에 대한 디자이너로서의 남다른 인사이트가 있어요. 이걸 매끄럽게 다듬어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요.
위에서 예로 들었던 제안 담당자를 다시 떠올려 보자구요.
자~ 몰입 들어갑니다. (레드썬!)
(ver.비장)
이제 남은 건 최종PT다. 남은 에너지를 끓어 모아 원기옥을 쏘아 올려야 할 때가 왔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10분. 내 손에 든 이 100장의 제안서를 어떻게 뜯어고쳐야 할까.
하.
나....
지금부터 뭘.... 어쩌지?
저의 이야기가 답이 될 거예요.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