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사회의 비극을 극복해 나가려면

사회에서의 성숙

by 노샘

비극적인 뉴스를 보았다. 생후 6개월이 된 난치병을 앓고 있는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머니에 대한 기사였다. 어머니의 핸드폰에는 아기를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취지의 메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러한 극한의, 극단의 상황까지 몰고 간 것일까?


당면한 상황에 대한 어려움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고, 본질적으로는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이 된다. 무엇에 대한 기대인가? 앞으로 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에 대한 기대, 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기사를 보며 우리가 어떠한 취약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회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과연 그런가?


지금의 시대는 능력주의가 팽배해 있다. 너도 나도 더 많은 부와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타인의 관심을 받기 위해 능력을 갈고닦고 있으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여기에서 취약성,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사회경제적인 것이든 그 어떤 취약성도 설자리가 없다. 약점이 곧 불행이 되는 시대이다. 나는 그런 취약성을 결코 가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과연 합리적인 것일까?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생각난다. 복싱 챔피언을 꿈꾸는 가난한 여성인 매기는 자신의 노력과 재능, 즉 능력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경기 중 상대 선수의 반칙에 의해 전신마비라는 취약성을 가지게 된 매기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고자 한다. 스스로 죽을 수조차 없는 매기에게 트레이너였던 프랭키가 안락사를 도와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능력을 잃어버리고 취약성만 남은 사람들의 설자리는 과연 어디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누구라도 언젠가는 취약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를테면 거동조차 불편한 노인이 되었을 때 말이다. 그럴 때에 사람의 존재가치는 상실되는 것인가? 존재가치가 능력으로 환산되지 않는, 취약성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이 유지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오늘 본 기사와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능력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기꺼이 취약함을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 자신의 취약함을 끌어안고, 또한 타인의 취약함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평가와 경쟁이 아닌 공감과 연대를 통해 견고한 능력주의를 허물어 갈 때, 그것이 곧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