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 불안이 생기지 않도록

관계에서의 성숙

by 노샘

정도의 차이가 있겠으나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불안을 가지고 있다. 일이 잘못되지는 않을지, 혹은 어떤 우려스러운 일이 발생되지는 않을지 등의 이런 작은 불안들 말이다. 그런데, 이 '작은 불안(small anxiety)'의 깊은 곳에는 더 '큰 불안(big anxiety)'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나'라는 존재에 대한 불안이다. 내가 도대체 누구인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 의문과 그 불확실에서 비롯되는 불안이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불안은 눈에 띄지 않지만, 이것이 크면 클수록, 눈에 보이는 작은 불안(small anxiety)이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결국 늘 불안을 겪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의 '작은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해법을 위해 '큰 불안'을 다루어야 한다. '큰 불안'을 다루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되돌아보는 것이다.



'나'에 대해 찾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지나온 삶의 궤적들을 거슬러 가게 될 것이며, 그 끝에는 바로 아주 어린 나에게 완벽 그 자체였던 '부모'라는 세계가 나타난다.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부모라는 존재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부모라는 세계는 아이에게 완벽한 것이며, 완벽한 것이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균열이 발생되는데,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는 완벽하지만, 실제 부모는 여전히 미숙하며, 여전히 성숙을 쌓아가야 할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물리적, 심리적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때로는 부부간의 갈등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간접적인 상처를 주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아이에게 완벽해야 할 부모라는 세계가 나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모순적인 현실을 아이들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부모는 완벽 그 자체이니까. 그래서 선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자책이다.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맞을 짓을 했다거나, 혹은 자기가 말을 듣지 않아서 부모가 싸운다거나 그런 생각을 해야만, 자기가 속한 부모라는 세계의 완벽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고 누적되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결국 '큰 불안'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에는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정말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 된다. 또 다른 깊이 있는 신뢰관계 속에서 큰 불안을 다루는 경험이 있을 때에라야 비로소 그것은 극복될 수 있다.



그래서 어린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이가 존재론적 불안감을 가지지 않도록, 그것이 '큰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건강한 정서를 가질 수 있도록 부모가 노력하자고 말이다. 나는 아이들을 가끔 꽉,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로 꽉 자주 안아준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나에게 더 세게 안아달라고 요구한다. 이러다 다칠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이 꽉 안아주는 것에서 아이들은 부모라는 세계로부터 꽉 붙들린 것처럼 안정감을 획득한다. 기본적으로 불안은 통제 불가능하며, 무언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듯한 느낌을 가지는 것인데, 이런 꽉 안아주는 행위는 아이들로 하여금 완벽한 통제감과 부모로부터의 강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에 효과적이다.



꼭 아이가 아니더라도, 내게 소중한 누군가를 꽉 안아줌으로써 우리의 근원적 불안을 조금은 날려 보낼 수 있는 밤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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