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탑이 낡아 언젠가 유명을 달리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지난해 블랙 프라이데이 특가 노트북을 찜해 놓았고 그날이 오자마자 나는 망설임 없이 구입했었다. 그래도 낡은 랩탑은 버리기 아까워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모시고 살작정이었다. 그런데 속도는 점점 심각하게 느려지고 동영상의 버퍼링은 습관처럼 빙글빙글 돌아간다. 치매다. 다행히 1 테라바이트 용량의 외장하드 한 개가 아직도 넓은 창고라 갑자기 운명할 것을 대비해 기억들을 기계에서 하나씩 차분하게 절개하기 시작했다.
"메스'
기계에 구겨져 있던 기억의 한편부터 절개를 시작했다. 기계를 열자 제일 먼저 용량을 많이 차지하는 명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주 오래전 영화 중에 명작으로 잘 구분해 놓은 것들이 요즘 스트리밍의 발전으로 저장할 필요가 없어졌다. 영화를 잔뜩 지우고 나자 문득 영화내용도 떠오르고 처음 볼 때 기억도 새록새록 등장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보던 기억까지 입가에 미소로 스며 나온다. 두뇌는 좋은 것만 저장하는 본능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삶이란 시간에 얹혀살아 항상 좋은 것으로 가득할 수 없고 좋고 나쁜 것이 교차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나쁜 경험과 나쁜 기억은 몹시 싫어한다.
영화를 총량대비 반이나 지우자 몇 개만 남았다.
남겨진 영화는 아마 새 노트북으로 이사할 때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들은 외장하드뿐 아니라 여기저기 분산해서 저장했다. 한 개를 잃어버려도 쉽게 복원하기 위해서... 사진은 추억이라 여간해서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간혹 미국에서 화마나 수마에게 집을 잃고 망연자실한 가족들이 재산보다 기억을 날려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내 가슴도 찢어지는 것 같다. 우리도 죽으면서 기억을 날리고 남은 자들은 우리 기억을 가지고 산다. 그래서 나는 그들 혹은 그것과 공유한 기억의 유산을 많이 간직하려 애쓴다.
매들린 마틴의 "런던의 마지막 서점"이 생각난다.
폭격을 견뎌낸 영국 소시민의 이야기 속에 내가 겪어보지 못한 전쟁 폭력을 느꼈다. 나쁜 기억을 가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한평생 그 기억의 참혹한 고름을 짜면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 없는 무명용사의 유골을 파헤치는 우리의 노력도 가슴에 와닿는다. 기억의 유산은 달고 쓴 모든 것을 포함한다.
영화를 정리하고 사진을 정리하자 회사자료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칼을 대기 전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해 놓았다. 자료 속에는 동료 얼굴도 함께 등장한다. 창업 때 함께 하던 사람들, 첫인상 그리고 알면서 알게 된 다양함, 여러 군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잘못했던 기억도 그들 사이로 지나간다. 난 일과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는데 평생 미숙한 사람으로 살아온 것 같다.
이것저것 기억을 헤집고 다니며 분주하게 파일을 정리했다.
새 폴더는 "2023 Jan 노트북"이라 이름 지어주고 외장하드 창고에 깊숙이 던져 버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낡은 노트북에게 회춘, 초기화를 선물했다. 나이 들면 점점 느려지다 아주 꺼져버릴 우리 인생처럼 노트북도 그리 생을 마감하겠지.
오래전 내 세금 보고 해 주던 회계사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2세 교포다. 그는 한국말을 참 잘했고 미국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다 전공을 바꿔 회계사가 되었다. 그는 전공지식뿐 아니라 종교, 철학, 역사, 문학 등에 박식하고 독서가 많았다. 나는 그와 자주 만났고 항상 긴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 우리란 존재 참 우습지 않나요? 원숭이 보다 좀 난 것 같은데 원숭이 만도 못한 존재~"
함께 웃었지만 난 그의 말이 죽비소리처럼 들렸다.
올해는 차분하게 삶의 심연에 들어가 기억을 정리하고 빈 공간에 성숙한 기억을 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