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노아 Jan 25. 2023

두 친구

  나에게는 미국에서 친해진 동창 두 명이 있다. 


 둘 다 나와 동갑인데 성격은 정반대다. 한 친구는 고등학교 동기고 다른 한 친구는 대학동기다. 사실 우리 셋은 모두 미국에서 처음 만난 사인데, 나를 중심으로 가까워져 서로 불알친구처럼 지냈다. 내 고교동기 은 키가 작고 왜소한데 늘 과묵한 편이며 현재 이민변호사로 한국에서 법대를 나오고 여기서 자격을 얻어 사무실을 가지고 있다. 그때 우리가 살던 곳은 어느 순간 한인 변호사가 많아져 경쟁 구도를 갖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늘 자기 비즈니스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점잖고 타인에게 다정했으나 그의 아내만큼은 예외였다.


 대학동창인 ㅊ은 ㄱ과 달리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얘서 부티 나게 생겼다. 그는 조금 늦은 나이에 미국에서 신학대학원 M.Div을 공부했다. 대학 다닐 땐 내가 이공계열이고 그가 인문학 쪽이어서 서로 잘 알지 못했다. 그는 미국교회에서 음악목사로 일한다. 그는 미국인처럼 말이 많고 모두에게, 특히 자기 아내에게 친절했으며 늘 명랑했다.  게다가 그는 클래시컬 뮤직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음악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둘에 비하면 나는 키도 중간(173cm)이고 말수도 많다가 언제는 또 조용한, 중간  어딘가에 있었다. ㅊ은 나보고 나이 들며 조울증이 있는 것 같다고 놀렸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가 심할 땐 너무 시끄럽고 이 오시면 너무 조용해서 옆에 없는 줄 알았다며 놀려먹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내가?"라는 똑같은 제스처로 반문했다. 그는 노가리가 쎄서 오랫동안 말을 하다 보면 늘 설득을 당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내가 조울증이 있나 보다 믿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날은 조울증에 대해 검색하느라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그는 음악이지만 "믿음을 심어주는 목사"였다.


 우리는 자주 만났고 특히 부부동반 모임은 제일 재미있었다.


 미국은 어차피 "가정의 나라"이기 때문에  가족이 재미없으면 나가 놀 곳이 없었다. 반대로 한국은 "거리의 나라"여서 나가면  놀 곳도 많고 매일 밤 직장인 대부분 파티약속이 잡혀 있어 늘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도 한국흉내를 내려고 각자 집에 노래방 기계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부부동반 모임이면 "노래방" 아닌 "노래집"에서 무장해제가 되었고 아이들은 각종 게임을 들고 와 오락실을 만들어 놀다 모임이 끝날 무렵엔 노래기계를 점령해 동요와 만화주제가를 불렀다. 우리는 손주들 재롱잔치에 손뼉 치는 노인처럼 하하 호호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끄떡였고 그때는 집에 갈 시간이었다. 한마디로 모두가 즐거워했다.

  

 말없는 ㄱ변호사 모이면 말이 많아졌다. 부부사이는 잠시 휴전인지 서로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ㄱ 아내는 한국에서 변리사였다. 둘 다 법조인이다. 모임에서 ㄱ이 떠들면 ㅊ목사와 나는 끼어들지 못했다. ㄱ은 한국에서 사 온 유머책 몇 권, 우리에게도 한 권씩 선물한, 을 외워서 들려주었다.


" 너희들 바보 삼룡이가 걸을 때 어? 어~ 하고 걷는데 왜 그런지 알아?" 우리가 잠시 띵~하고 있으면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답을 말했다.  " 앞으로 걸을 땐 팔이 앞으로 나오잖아 그래서 어~ 팔이 있구나 하고, 팔이 뒤로 가서 없어지면  어? 어디 갔지? 하는 거야"


여자들은 구시대 유머에 깔딱 넘어갔지만 난 솔직히 그런 게 웃기지 않았다.





 평소에는 ㄱ보다 ㅊ과 더 친했다.

 조금 더 친한 이유는, 음악 목사로 재직하는 그의 미국교회를 내가 출석해서 그런지 모른다. 그의 장점은 음악을 인도하며 잡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끔 찬양을 인도하며 자기 간증이랄까 스스로에게 취해 주절주절 늘어놓는 리더는 정말 싫은데 그는 항상 음악에 집중했고 감성팔이를 하지 않았다. 그의 기타 연주 실력은 함춘호 같았고 노래도 대단했다.  노래할 때 그의 영어발음은 원어민 같았다.(말할 때는 부산사투리로 영어를 했다)


 ㅊ과 나는 자주 점심을 함께 먹었다.  지난주 금요일 가족파티에서는 ㄱ이  말없이 와인만 들이키며 그들 부부가 사이가 안 좋다고 이마빡에"광" 붙이고 고스톱 치는 양 유세하던 주말을 지낸 다음 월요일이었다.

 

ㅊ이 말했다.

" 넌 말없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나도 과묵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


" 너도 그렇구나. 가끔 보면 과묵함 뒤에 비겁이 숨어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 말없는 사람의 특징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거나 대화에 관심이 없거나 머리에 계산이 많은 사람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자기 말을 잘 따라오는 내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부연해서 더 설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비겁함이야. 계산된 침묵을 신중함이나 무거움 따위로 위장한 거지. 왜 우리 한국인 전통 중에 입이 무겁다는 것을 좋게 생각하잖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유학 중에 언어가 짧아서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잖아"


나는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미소를 머금고 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거지, 남을 의식해서 완전하지 않으면 말하려 하지 않고 또 말 꺼냈다가 망하면 탈락하니까, 중간만 하자. 이것도 우리가 단체로 살아가면서 우리도 모르게 습득한 문화유산 인 셈이야"


 오랜만에 우리는 한국식당에 돼지국밥 먹다가 친구의 입이 열려서 한 편의 강의를 듣는 꼴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내친김에 한국 커피숍까지 이야기를 쟁반에 담아 두 손에 조심스레 들고 자리를 옮겼다.

 그날 그의 논제 "과묵에 숨은 비겁"은 재미있었다. 


 평소 ㅊ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ㅊ과 만나고 집에 오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린 기분이었다. 그는 항상 내 이야기를 경청했고 내가 말한 내 약점이나 내 실수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 반면 ㄱ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내 이야기에 민감하며 때론 지적질을 했다. 그래서 ㄱ와 만나고 집에 오면 잠들기 전에 항상 기분이 나빴다. 난 다음부턴 내 속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지 하고 또 말하다 보면 하게 되고 어김없이 ㄱ에게 지적을 당했다. 어쩌면 ㄱ은 과묵하지만 예민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날저녁  평소 말없는 사람들을 하나둘 내 머릿속 법정에 세워 보았다.  


제일 먼저 ㄱ이 떠올랐다. ㄱ은 이민변호사지만 평소생활은 판사처럼 굴었다. 그의 아내가 나와 따로 만나서 자기 남편 이야기를 하루종일 들려준 것을 그는 몰랐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과묵하지만 항상 자기 아내에 대한 불평엔 말이 많았다. 자기는 옳은데 아내가 문제인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반복해서 말했다. 언젠가 그에게 부부생활의 과실은 51:49라고 했다가 그가 말없이 식사비용을 계산하고 나 간 날도 있었다.


" 어쩌면 ㄱ은 화해나 용서에 대해 용기가 없는 것일지 몰라"


나는 그날밤 생각이 많았다.

두 친구에 대해 그리고 과묵함이 항상 옳은 것 인지에 대해, 늦은 밤까지 뒤척거렸다.      


사실 그날 ㅊ이 커피숍을 나가면서 잠깐 뜸을 들이다 마지막으로 한말이 마음에 더 걸렸다.


" 친구야. 사실 나 많이 아파. 기도해 주라"


요즘 내가 시카고로 이사 오고 난 뒤 친구들과 연락이 뜸해졌다.


다음 주는 잠시 휴가를 내서 친구를 찾아가, 무슨 병인지 물어봐야 할 것 같다.    


 https://youtu.be/Q250pAVQf0g

   

  

작가의 이전글 우리가 행복할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