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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Jan 15. 2023

우리가 행복할 때

 분명 우리를 공격하고 있었다.


 놈들은 떼를 지어 침입자 격퇴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도망는 것뿐이었다.  여기저기 비명소리가 들리고 살아남고자 하는 절박함이 더 간절한 자들이 더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렸다. 물론 우리가 무덤가에 논 것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나는 다행히 한 군데 정도밖에 안 물렸고 친구들은 두세 군데 이상 쏘여 머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땅벌이었다. 일곱 살 어린 시절 벌에 물린 기억이  행복하다고 기억하는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거대 도시에 살면서 시골을 그리워하고 시골에 지내면 도시를 갈망하는 모순 덩어리 같은 내가 요즘 한국시골이 그리워진다. 행복의 순간을 도시에서 만들기 어렵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것, 어린 시절 땅벌에 물려 된장 바르던 기억을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도 사실은 흙을 그리워하고 흙에서 행복을 느끼고 살아서 그런지 모른다.


정말 한국시골에서 흙을 만지고 살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  그때 흙내음은 말 그대로 향기로왔다.


" 오빠 이번엔 배추랑 무를 심어봐"


농사라고는 지난겨울 심어 둔 마늘양파가 전부인 나에게 동생은 말만 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에게 처럼 말한다. 그해에도 생전 심어보지 못한 무와 배추를 텃밭에 심었다. 나는 연습이라 말했지만 진심은  성공하고 싶었다. 고작해야 배추 이십 포기, 씨로 파종한 무구멍 이십여 개 정도니 김장용이라 하기엔 초라하지만 연습이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땅을 파고 흙을 갈고 토양살균제와 퇴비 비료를 물 반 고기반처럼 흙에 섞어 쓰는 재래식 농법을 사용하지 않고, 반대로 잡초를 방치하고 다른 뿌리식물들과 함께 자라는 유기농법을 따랐다. 그때 신선한 흙냄새를 맡았고 지렁이를 만졌다. 직접 손을 스치던 흙은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 결국 흙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농사의 결과는 어마무시했다. 배추의 당도와 텍스쳐의 질감이 사서 먹는 배추와 비교되질 않았으며 무의 크기는 괴물 같고 그 맛도 사 먹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예상 못한 수확에 놀란 가족들은 즉석 미니김장을 해버렸고 난 그때 아주 많이 행복했다. 흙에서 건진 뜻밖에 행운이었다.    


 




오래전 미국에서 가장 아끼던 친구가 젊은 나이에 죽었을 때 나는 그동안 믿던 신을 맹 비난했었다. 내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을 때도 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젊은 친구를 데리고 떠난 순간 치미는 분노는 막을 수 없었다. 갑자기 죽어버린 친구는 단단하고 값나가는 관에 누워 있었다. 그의 아내는 한쪽으로 내 손을 잡고 반대쪽은 장의사의  팔짱을 끼고 아주 천천히 복도를 걸어 그가 영면한 관에 다다랐다. 친구는 뽀얀 얼굴에 양복을 입고 잠들어 있었고 그의 아내는 흐느꼈다. 세미나 도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저렇게 누워있을 줄 꿈에도 상상 못 한 친구는 정말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친구 아내는 말했다.


" 제일 비싼 관으로 했어요. 몸에서 피를 빼고 관을 진공 상태로 하면 벌레도 안 생기고 아주 오랫동안 부패하지 않은 채 유지할 수 있데요"        


그때는 슬픔에 젖어 잘 몰랐지만 지금은 친구의 매장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시신은 흙으로 가도록 매장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육체는 플라스틱 같아 보인다.





오래전 사랑하던 애견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녀석은 이 찬란한 세상에서 이년밖에 살지 못했다. 한창나이에 떠나는 생명은 언제나 가장 슬프다. 녀석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가족은 그의 마지막 숨소리를 들으며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 절박한 슬픔의 지점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죽음을 신속하게 정리하는 인간 세상 트렌드를 따라 애견은 빠르게 화장되었다.


 그는 한 줌 재로 가족 품에 다시 돌아왔지만 아무 말 없이 재롱도 없고 밥 달라고 발차기도 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몇 달째 식음을 전폐하고 슬픔의 바다에 빠져 버렸다. 그 슬픔의 탈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결정한 것은 쥐새끼만 한, 어머니 표현에 의하면, 세 달 된 혈육 강아지를 강원도에서 찾아내  품에 안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를 떠난 그 아이는 아직도 우리 기억 속에, 컴퓨터 속에 지금도 살아 있다. 2023년 새해 가족달력을 만들 때도 그 아이는 항상 웃는 얼굴로 지면을 차지한다.


그 유골함을, 도무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녀석의  가루를, 마침내 일몰이 잘 보이는 바닷가 숲 나무밑에 묻어주었다. 우리만 알도록, 녀석이 평소 물고 다니던 돌 하나를 흙에 묻어 표시하곤 마침내 보내드렸다. 그 순간의 행복감, 아니 안도감. 흙으로 돌아간 생명의 귀향에  감사드렸다. 그 행복한 느낌은 무슨 흙이든 손으로 흙을 만질 때마다,  냄새가 코로 올라올 때마다 유사하게 느낀다. 자연으로 돌아가 완전에 귀의한 , 그 완전이 빗방울을 타고 우리를 다시 노크하든, 완벽한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나 자기 눈동자를 우리에게 맞추든 우리는 늘 행복할 것이다.   


가끔은 하늘보다 흙이 좋다.


흙과 함께 할 때 느끼는 행복감은 누군가에게 나를 내어줄 때 느끼는 행복감과 비슷하다.


가끔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글이나 말로 잘 만들어내지 못할 때,


세련되어, 타인에게 팔만한 수준의 작품을 만들지 못할 때,


흙속의 지렁이처럼

내 안에 미숙함을 아는 그 순간이 행복할 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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