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아리 Mar 16. 2022

화장실의 규칙

20220316 - 에세이(1) 

내가 다니는 회사에는 화장실이 있다. 다른 많은 회사에도 있겠지만 이 회사에도 있다. 나는 여자이므로 여자화장실을 이용한다. 그곳에는 칸막이 하나 당 변기가 하나 씩 들어있으며 총 세 개의 칸이 있다. 대부분 맨 왼쪽 끝이나 오른쪽 끝의 칸을 사용하는데, 그렇다면 사실 제일 깨끗한 칸은 가운데 칸일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양 끝 칸을 사용한다. 가운데 칸을 쓰면 옆 칸의 사람과 너무 밀착된 느낌이 들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가운데 칸을 먼저 점령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화장실은 양 끝 칸부터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첫 번째 규칙이다.


화장실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가장 주요한 배변의 용도도 있지만, 양치를 하거나, 손을 씻거나, 그냥 혼자만의 공간에서 쉬고 싶을 때 사용되기도 한다. 변기를 사용하기도 하고 세면대를 사용하기도 한다. 변기를 사용한 후 바로 세면대를 사용할 수도 있다. 여기서 두 번째 규칙이 등장한다. 똥을 싸고 나면 칸 밖에 위치한 화장실 세면대에 아무도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칸 안에서 기다렸다가 주위가 조용해졌을 때가 돼서야 문을 열고 밖에 나갈 수 있다. 혹시 옆 칸의 사람이 먼저 나간다면 그 사람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화장실 밖으로 완전히 나갈 때까지 내 칸의 문을 열지 않아야 한다. 무심코 문을 열었다가는 똥 싼 자의 얼굴을 확인시켜주게 되고, 그 사람도 나도 어색한 눈빛을 교환해야 한다. 그 사람과 내가 아는 사이라서 인사라도 해야 한다면 상황은 더욱 곤란해진다.


옆 사람이 언제 나갈 것인지는 귀를 쫑긋하면 알 수 있는데, 변기 물이 내려간 후 바로 옷을 추스르는 소리가 난다면 오줌을 쌌다는 뜻이고, 이는 곧 나간다는 뜻이다. 그런 경우 다른 칸의 나는 똥을 다 쌌어도 그 사람이 모든 용무를 마치고 화장실을 벗어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변기 물이 내려간 후에도 한참 조용하다면 이는 그 칸의 사람도 똥을 싸는 것이고 변기 물소리는 페이크이기 때문에 선택지가 생긴다. 첫 번째 방법은 그 사람과 타이밍이 겹치지 않도록 재빨리 똥을 다 싸고 먼저 손을 씻고 나가는 것이다. 그 사람 역시 내가 세면대를 사용하고 있는 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약간의 눈치싸움이 필요한데, 상대방이 먼저 일을 마치고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어느 정도 텀이 길어진다 싶으면 상대방은 규칙을 알아채고 먼저 나갈 것이다. 


만약 내가 칸 안에서 똥을 싸고 있는 도중에 칸 밖에서 누군가 양치를 한다거나 심지어 화장이라도 한다면 낭패다. 그럴 때는 내가 볼일을 다 봤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모든 용무를 마칠 때까지 변기에 쭈그려 앉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건 내가 똥을 쌌다는 전제 하에 있다. 오줌을 쌌다면 당당하게 바로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 그들과 인사까지도 나눌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남자화장실도 이런 규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녔던 회사나 화장실의 여자화장실은 모두 동일한 규칙이 존재했다. 단, 이 규칙은 화장실의 칸이 많이 배치된 백화점이나 지하철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넓은 공간에는 칸의 개수가 많아서 똥을 누가 쌌는지 모를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똥을 사고도 마치 오줌만 싼 사람처럼 자신 있게 걸어 나올 수 있다. 


매일 규칙을 지키며 사는 것은 조금 힘이 든다. 하지만 규칙은 깨라고 있지 않던가? 와장창 똥을 싸고 바로 칸 밖으로 나가고 싶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옆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개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얼른 용기를 키워서 그런 멋진 어른이 되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에 대한 고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