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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am Aug 30. 2016

대화가 필요해

의사소통에 대하여


의사소통과 언어: 우리의 언어는 정말 같은 것인가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대화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대화, 좀 더 포괄적인 학술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의사소통은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이뤄지는 말들의 섞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바일폰을 사용해서 뉴스 기사와 같은 텍스트를 읽는 것도 의사소통이며 횡단보도에 서서 약속된 보행신호를 읽고 행동하는 것도 의사소통이다. 문자로 대표되는 기호를 사용하여 사람 혹은 사물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생활을 하는 것, 그것이 인간사회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쉽게 말해 대화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있을 지라도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매 순간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기본도구는 언어다. 언어학자들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성은 언어의 사용이라고 본다. 언어야말로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도구이며 동물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언어의 발전은 인간 진화와 그 궤를 같이 해왔다고 본다. 인간 뇌의 용적이 커지면서 의사소통하는 언어의 복잡성도 함께 증대됐고 그로 인해 현재의 인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과 언어는 불가분의 관계인 셈이다.


이토록 인간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언어인데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언어관이 있다. 동일한 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동일한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한국어 사용자들은 서로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할 만한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고 이것이 없다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개'라는 문자를 보았을 때 모든 한국사람들은 진돗개로 대표될 개의 형상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정보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사람들의 언어체계는 거의 똑같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대화는 항상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소통을 위해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는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일단 오해가 생기고 나면, 그 오해를 대신할 다른 어떤 언어를 덧붙여도 오해는 깊어지기만 한다. 그럴 때면 나의 의도, 진심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탓하기도 한다. 내 마음을 그대로 꺼내서 보여줄 수 있다면 오해가 해소될 것 같은데, 현실에서 구현되는 나의 마음은 언어의 형태를 빌리고 있다. 그럼 이러한 오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의사소통 구조에 대해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언어라는 중간 매개체를 사용해서 정보나 감정을 전달한다. 의사소통을 연구하는 학문에서는 이를 '매개체(medium)'이라고 하는데 모든 형태의 의사소통은 매개체를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예를 들어 TV도 음성신호와 영상신호를 전파로 전달해서 TV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시청자들에게 전달되며, 모바일폰 역시 0과 1로 이뤄진 데이터를 전파의 형태로 전달해 스마트폰이라는 매개체를 거쳐서 사용자들에게 전달된다. 

보편적 의사소통 구조.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 내용을 암호화(Encoding)하고 복호화(Decoding)한다.

언어도 이와 동일하다. 먼저 발화자(말하는 사람)는 뇌 속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성한다. 그리고 발화자가 가지고 있는 언어체계를 통해 수신자(듣는 사람)가 듣기에 적합한 형태의 언어 메시지로 변환한다. 이렇게 뇌 속에서 생성된 언어 메시지는 조음기관을 통해 음성의 형태로 수신자에게 전달된다. 이렇게 전달된 음성메시지는 발화자가 메시지를 생성한 순서의 역순 과정을 거쳐 내용을 해석한다. 그 후에 발생할 오가는 대화는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가 아무런 의식 없이 사용하는 언어 메시지의 생성과정을 풀어 설명하면 이렇게도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에서 생성되는 언어 메시지는 언어라는 매개체로 암호화(Encoding)되고 복호화(Decoding)되는데 이때의 전제는 대화에 참여하는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동일한 암호화-복호화 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서로 암호화하고 복호화하는 시스템이 서로 다르다면 당연히 해석이 안 될 것이고 대화는 이뤄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영어만 말할 수 있는 사람과 프랑스어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서로 가진 암호화-복호화의 시스템이 완전히 달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어가 달라서 발생하는 암호화-복호화 실패의 사례는 동일한 모어 사용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동일한 모어지만 서로 다른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기에 발신자가 의도한 메시지대로 해석하는데 실패하는 것, 이것이 오해가 발생하는 이유이다.



개인어, 개인어 사전, 그리고 해석체계


여기서 글의 처음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진정으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언어는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보편적 언어다. 다른 하나는 개개인이 쌓아온 경험에 따른 개별적 언어다. 우리의 의사소통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방해 요소는 바로 개별적 언어인데 이것을 학술적 용어로는 개인어(idiolect)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개'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개를 한국어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동물> 갯과의 포유류. 가축으로 사람을 잘 따르고 영리하다. 일반적으로 늑대 따위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날카로운 이빨이 있다. 냄새를 잘 맡으며 귀가 밝아 사냥이나 군용, 맹인 선도와 마약 및 폭약 탐지에 쓰인다. 전 세계에 걸쳐 모양, 크기, 색깔이 다양한 300여 품종이 있다. (Canis familiaris)
(네이버 국어사전)


사전적 정의는 개의 모습을 설명하고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기술에 그치고 있다. 사전적으로는 이런 '드라이'한 기술에 그치고 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개'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귀여움, 포근함, 충성스러움, 따뜻함 등을 떠올릴 것이다. 특히 개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더 그럴 것인데 이것은 철저히 개인적 경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로 어릴 적 낯선 개에게 물려서 다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개는 끔찍할 정도로 무섭고 두려운 존재일 수도 있다. 사전적 정의에서는 '개'에 대해서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는 사실만을 다루고 있지만 개인어에서 '개'는 각자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개인어에 수록된 단어들을 모아서 '개인어 사전(idiolect lexicography)'을 만든다면 70억의 인구는 70억 개의 사전을 가진다. 


개인어 사전에 어떤 의미 혹은 감정이 수록되어 있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오해가 발생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동일한 모어를 사용하고 있음으로 동일한 의미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의 언어는 이런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만일 개를 키우고 있고 긍정적 의미만 지닌 사람 A와 어릴 적 개에게 물린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 B가 개를 주제로 얘기를 나눈다면 그 의사소통이 원활할 리가 없다. 단순한 오해를 넘어 감정싸움까지 갈 수도 있는 문제다. 서로 어떠한 의미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개인어 사전이 어떻게 다른가가 원활한 의사소통의 조건이 된다.


오해와 이해의 언어


결론을 내보자. 우리의 언어는 서로 조금씩 다르다. 이것은 보편적 언어와는 다른 개인적 경험에 따라 구축된 개인어가 있기 때문이다. 각자가 이러한 개인어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단순하게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상정한 상태로 의사소통을 한다면 오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같은 공간에서 단 두 사람이 대화를 해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두 사람의 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순조롭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음에도.


동일한 것을 두고도 우리는 다른 것을 얘기하고 있다


굉장히 뻔한 이야기지만 이런 불완전한 의사소통 체계를 제공하는 언어 때문에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불알친구라고 할 지라도 그들이 가진 개인어 사전은 다르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 인해 그 친구들끼리 반목하게 될지도 모른다. 불완전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그런 언어를 쓰고 오해를 하고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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