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 더숲 소전미술관
우연히 보게 된 사진에 책장이 멋졌다. 천장까지 높이 솟아 있는 책장을 가득 메운 책을 보고 싶었다. 정보를 찾아보니 좀 떨어진 곳이다. 최대한 밀리지 않은 시간을 택해 출발했다.
작업실 대신 오늘은 이곳에서 작업을 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많이 구불한 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전혀 다른 이름의 카페였다. 골목을 잘못 들었나 보다. 다시 주차장에서 나와 이정표를 찾았다.
하얀 차가 지나가자 '소전미술관'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천천히 길을 따라 올라간 곳에 별도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를 하고 들어간 카페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불과 10분 만에 그건 내 착각임을 깨달았다.
작은 미술관이지만 조형물이 마당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예쁜 잔디라니. 정말 관리하기 힘들었겠구나.
건물만 하나 달랑 있어서 미술관인가, 카페인가 헷갈렸다.
들어가 보니 사진에서 봤던 그 거대한 책장이 보였다.
메인 홀이 명당자리라고 하더니 그 자리엔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창밖을 보고 싶었는 데 다음에 아이들이랑 함께 와서 도전해 봐야겠다.
(오픈런하지 않으면 절대 그 자리에 앉지 못할 것 같지만.)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기로 했다.
2층에서 보이는 책장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문을 위에도 책들이 가득하구나.
벽마다 보이는 창들이 시원해 보이기도 했고 나도 나중에 책방은 연다면 (로또가 된다면) 이렇게 통창을 크게 벽마다 설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의 전시회도 함께 열렸다.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 전시를 하는 작가가 매달 다른 듯하다.
조선 백자도 구경할 수 있었다.
공간을 모두 보고 자리를 잡았다.
가장 조용해 보이는 자리를 잡아 앉았는데 이 조용한 곳에서 고객과 통화를 하는 자영업자분의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분의 목소리가 묻히게 된 건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쁜 공간에 비해 사람들이 많아지니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내가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10분 정도. 딱 40분 만에 사람들은 목소리 크기를 자랑하는 냥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ㅜㅜ
다행히 내가 앉은자리는 1인석이고 벽을 바라보고 있으며 책을 읽는 여자분 옆에 앉았더니 그나마 책이 눈에 들어왔다.
주문을 하다가 책을 파는 코너도 있어 다시 한번 자세히 봤다.
책을 사면 커피쿠폰을 준다. 아메리카노 1잔이 무료이고 다른 음료를 선택할 경우 차액을 지불하면 됐다.
오호.
좋아하는 박소란 작가의 [수옥]이 있어 냉큼 집고 연유라테를 주문했다.
이건 너무 맘에 드는 코너였다.
옆에 계신 여자분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빌며 가져온 책을 꺼냈다.
이 책도 판매코너에 있었다.
반가워서 한 컷.
오늘 읽은 책은 13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을 낸 김애란 작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다.
13년 만이란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작가는 어떤 소설을 준비했을지 기대가 컸다.
내가 김애란 작가를 좋아하게 된 건 '에쿠니 가오리'작가와 비슷한 느낌의 문체라는 걸 깨달아서였다.
20대를 책임졌던 에쿠니가오리의 모든 책들. 모든 책들을 초판으로 예약구매해서 수집할 정도로 에쿠니가오리에 대한 사랑이 컸다.
방한했을 때 북토크에 선정되어 꼭 가야겠다고 미리 계획을 다 잡았었지만 갑작스러운 장애가 터져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이름을 날리던 20대 시절) 결국 야근을 하고 그다음 날 퇴근할 수 있었다.
후기 현장을 블로그의 글로 접하며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한낱 대리 주제에 일주일을 뚱하게 있자, 팀장이 미안하다며 회식을 준비해서 그나마 풀렸다.
그렇게 좋아하던 작가의 문체를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내 인생]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청아하고 몽환적인 문체, 읽고 있으면 가슴이 따스해지는 문장.
너무 반가웠다.
이 책을 시작으로 작가파기를 시작했다.
[비행운], [달려라 아비], [칼자국],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바깥은 여름]까지.
변함없는 문체에 이 작가의 팬이 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제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리마스터본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한국작가라면 더 가슴을 후벼 팔 문장을 한글로 읽을 수 있을 테니까.
(일본에 가면 서점에 에쿠니가오리 책을 찾아 문고판을 한 번씩 사 오기도 했다.)
그렇게 반갑게 만난 작가의 신작. 기대가 클 수밖에.
내 옆을 지켜주던 여자분은 돌아갔다.
나만 이 창을 바라보며 책을 계속해서 읽었다.
이 창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원함과 외로움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데 창문과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는 세 아이가 등장한다. 지우, 채운, 소리. 이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고 싶다. 읽다 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작가의 흡입력 짙은 묘사에 감탄을 하고 또 하게 된다.
책 속 지우는 지우개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 책의 굿즈가 지우개였나보다.) 좋아하는 이유가 공감이 갔는데 한 손에 들어오고 값이 비싸지 않아서라고 했다.
내가 예쁜 문구점에 가서 필기구를 고를 때 지우개가 빠지지 않는 이유랑 일맥상통한다.
지우는 훌쩍 자란 후에도 학교 운동장에 땅거미가 질 때면, 지겨움과 무서움이 분간되지 않고 최근 세상을 떠난 엄마가 몹시 그리워질 때면,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제 눈썹을 꾹 눌러보는 아이가 되었다. p11
아빠를 칼로 찌른 혐의로 교도소에 복역 중인 채운의 엄마. 채운은 그 사실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엄마가 강력하게 말린다. 사촌 선이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게 되면 반려견 뭉치도 눈칫밥을 먹게 된다.
한국을 뜨기로 마음먹은 뒤부터 채운은 이모부부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엄마의 면회를 앞두고 잠을 설칠 때마다, 선이가 별 뜻 없이 내쉰 한숨에 마음이 위축될 때마다 사방이 탁 트인 아프리카 초원이나 유럽의 돌길, 남아시아 해변의 야자나무를 떠올렸다. p26
엄마를 칼로 위협하던 아빠를 말리던 채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피범벅이 된 아빠와 자신이 서 있을 뿐이다. 엄마가 그 피를 자신의 옷에 묻히고 경찰에 신고했다. 채운대신 형을 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본 아들의 마음이 먹먹하게 다가왔다.
볼살이 좀 바진 듯했으나 깊고 검은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작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무언가 포기하지 않는 눈, 자기 안의 문제를 종료시키지 않은 눈이었다. p49
지우는 ‘레드 아이 아머드 스킨크’라는 파충류를 키운다. 현금봉투를 주워줬다는 이유로 고맙다고 사장이 선물로 알 세 개를 주었고 그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용식’이었다.
'레드아이 아머드 스킨크'는 '빨간 눈갑옷 도마뱁'이라는 이름으로 정보가 있어 가져왔다.
https://namu.wiki/w/%EB%B9%A8%EA%B0%84%EB%88%88%EA%B0%91%EC%98%B7%EB%8F%84%EB%A7%88%EB%B1%80
검색해 보니 분양가도 꽤 높은 도마뱀이다.
지우의 용식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소리는 지우의 엄마가 죽었을 때 유일하게 장례식에 온 친구였다. 입시미술을 하는 소리와 만화를 그리는 지우는 그런 점에서 통하는 게 있었다.
채운은 아버지가 있는 요양원으로 면회를 간다.
침대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 나오는데 예전 우리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모습이 떠올랐다. 작은 아들인 우리 아버지가 집으로 모시겠다고 했지만 큰 엄마가 절대로 안된다고 하시며 본인이 운영하는 식당 근처 요양원으로 모셨다. 내가 출산하기 전에 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 거의 정신을 놓으셨지만 나를 알아보셨다. 할머니는 행복이를 출산한 후 한 달 뒤 눈을 감으셨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지역 납골당에 모셔져서 해마다 할머니 기일에 찾아뵙는다. 모든 형제들 중 유일하게 작은 아들 딸인 내가 말이다. 침대 위의 할머니 모습이 겹쳐졌다.
기름기 없는 양볼도 전보다 움푹 파이고 체중도 꽤 준 듯했다.
병원에서 관리를 안 하는 건지 환자에게 으레 있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각질이 허옇게 인 아버지의 손등 위로 시퍼런 멍자국이 보였다. 주삿바늘 때문에 생긴 자국인 듯했다. p75
지우는 소리에게 용식을 맡기고 숙식을 하며 노가다일을 한다. 외삼촌댁에서 지내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한 채. 자신보다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지우는 소리에게 행복함을 담은 문자를 전송하기도 한다.
언젠가 나도 겨울 바다에서 눈을 맞으며 내 키보다 더 큰 파도에 올라서보고 싶어. 그리고 그런 나를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 나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하라고.
‘내게 죽음이라는 가장 큰 거짓말을 남기고 떠난 엄마, 나를 위한다면서 바다 쪽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삶의 방향을 튼, 용서할 수 없는 엄마’를. p90
진짜 바다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는 바다를 보며 그렇게 잘 살고 있다고 하고 싶다는 마음을 읊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났다.
(이 책을 집이 아닌 외부에서 읽는 것은 좀 위험하다.)
소리는 능력이 하나 있다. 손을 잡았을 때 흐릿하면 그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소리에게 그게 보였다. 엄마를 잃고 난 후 사람들과 손을 잡지 않게 되자 결벽증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소리에게 뭉치가 다가왔다. 희뿌옇게 보이는 뭉치는 채운이 키우는 레트리버 강아지인데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희뿌옇게 보이니 눈물이 난다.
나도 눈물이 났다.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잇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 리 없는 저열함 같은 게. p140
책을 끝까지 읽고 덮으면서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한 번 읽은 소설은 다시 읽지 않는 편인데 꽂히게 되면 몇 번이고 찾아 읽을 때가 있다. 다음에 읽었을 때 이 먹먹함이 내 마음을 뚫고 나올지 궁금하다.
작가의 신작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