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여관으로 오세요 — 허수경 시인을 따라
2014년 가을 허수경 시인(1964-2018.10.3.)은 후일 자신의 유고 산문집이 되는 『오늘의 착각』(난다, 2020) 책머리에 이렇게 「작가의 말」을 썼다.
작가의 말
착각의 사전적인 정의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지각하고 생각한다”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전적인 정의는 착각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우리에게 치료를 위한 아무런 처방전을 내놓지 않는다. 하긴 착각이라는 상태에 대한 처 방전이 있을 리가 없고 있을 필요도 없다. 착각은 우리 앞에 옆에 뒤에 그리고 언제나 있다. 방향을 가리키는 전치사와 후치사 사이에 삶은 있다가 간다. 방향을 잃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착각은 또한 시인이 이 지상에 개점한 여관에 든 최초의 손님들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의 영혼에게 가장 많은 잔심부름을 시키는 이 손님을 시인은 내몰 수가 없다. 심부름의 대가로 시인이 얻는/잃는 것이 너무나 많기에. 시인은 이 공존을 이미 받아들였다. 착각은 발칙하게도 시인이 이 지상에 차린 여관에 손님으로 와서는 어느 사이 여관 이름마저 ‘착각’이라고 개명해버렸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착각여관에서 한 생을 살고 있는 시인으로 이 에세이를 시작한다. 이 글이 연재된 『발견』이라는 시 잡지의 이름이 어떤 '착각'의 증거일 수도 있기에. 발견은 없다. 다만 어떤 상황을 착각으로 살아내는 미학적인 아픔의 순간이 시에는 있을 뿐이다. 발견의 어두운 그늘을 걷는 것이 어쩌면 시인의 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하이네가 명명한 "고아가 된 노래"를 붙잡고 착각의 기타 소리가 흐르는 세계를 걸어가다가 다시 착각여관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다면.
2014년 가을, 허수경
드문드문 책을 읽고 「작가의 말」을 옮겨 적은 날 적은 노트.
공자가 정명(正名)을 하는 동안 시인은 개명(改名)을 당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명이라는 듯 흔쾌히 받아들이고는 ‘네가 그렇지’ ‘내가 그렇지’ ‘사는 게 그렇지’ 말해 버린다. 이 흔쾌한 긍정을 나는 폐허의 도시 위에서 영광을, 심심하게 읽어내는 어느 고고학자의 마음이라고 멋대로 읽어 버린다. 착각이 들어와 개명한 여관을 기웃거리며 나 또한 열심히, 절절하게 오독(誤讀)한다.
발견은 없고 “어떤 상황을 착각으로 살아내는 미학적인 아픔의 순간이 시에는 있을 뿐”이라는 시인의 말을 나는 그렇게 들었던 모양입니다. “발견의 어두운 그늘을 걷는 것이 어쩌면 시인의 일”이라는 말을 그날 옅은 아침 빛 속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습니다. 어쩌면 김지하 시인이 생전 그리던 미학 “흰 그늘의 길”을 허수경 시인이 진작 걸었더라고도 생각하였습니다.
그이는 진작부터 페허에 들었습니다. 시인이 폐허에 들었다는 말은,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 산 채로 정회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승에 서서 거닐지만 이미 저승에 속한 사람. 모두 다 다른 제것뿐일 때 주관, 너랑 나랑 마침 같게 보면 객관, 그러나 어떻게도 달리 볼 수 없으면 절대, 라고 한다면, 시인은 이 객관에도 못 미치고 눈뜬 장님들처럼 헤매는 세상에서 자꾸만 자꾸만 빛을 보고 제 빛깔을 보는 절대를 보는 자 — 그러므로 절대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 돼지 눈에는 돼지가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말.
그리고 우리는 바라-보는 것이 되어-갑니다.
시인은 볼 수 없는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게 하고, 자꾸만 바라다가 시인을 좇아 바라-보게 합니다.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아름다운 착각이고, 얻는 것도/잃는 것도 많은 일입니다. 이 착각이 우리를 부지런히 일 시킵니다. 자잘한 일부터 때로는 너무 커다란 일까지. 그리고 이 일들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고, 우리를 서로 이어줍니다. 이 절대의 고독과 단절로부터 절대의 연결과 연대로 이끄는 불안이 곧 안심인 전환을, 시가 해 줍니다.
어떤 착각도 일으키지 않아, 어떤 환상도 주지 않고 결국 아무런 진리로도 이끌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닙니다. 그런 시는 시의 탈을 쓴, 인두껍을 쓴 늑대와 같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사고로 이끌려 천국에 데려다 두어도 지옥만 맛볼 따름입니다. 지옥에서 살겁을 지으면서도 낙원에서 춤추는 듯 희희낙락하게 됩니다. 그것이 그 거짓시의 탓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거짓시를 시라고 부르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절명(絶命)의 때에, 절체절명(絶體絶命)이나 존망지추(存亡之秋)의 때에 아무리 불러도 제이름이 아니니 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를 홀려 불러놓고서 정작 저를 부를 때는 들은 체도 안 합니다. 사실 그의 이름이 아니므로.
그러나 시는, 내가 그를 찾지 않아도 내가 그를 그릴 때 달려와 옆에 섭니다. 다만 내가 그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살아가며 남을 원망할 일 따위는 없습니다. 참된 것은 늘 내게 오고 나를 부축하며, 그릇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나’라는 의식뿐이니까요.
어쨌거나 착각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 진상(眞相)을 접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거의 나를 바치는 것만 같습니다. 지극히 고귀하신 님께 진상(進上)하는 것입니다. 홀연 회오리바람을 타고 내려와 마녀를 무찌른 도로시(Dorothy, 오즈의 마법사 속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처럼 어떤 이들은 얼결에 그리로 가지만 그 무적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모험을 무사히 끝낸 도로시만이 기구를 타는 방법이 아니라 진짜 마법을 통해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시인들은 그래서 저승에 속했지만, 우리가 쓰는 말글로 시를 지으니 이승에 ‘돌아온 자’들입니다. 이 회귀자들은 영원에 속했으되 현재의 비루함을 ‘견디는 자’들입니다.
시인이 우리를 착각에 빠트리는 건, 그이들이 사랑할 만한 완전성을 지니지 않은 우리를 완전한 것인 양 사랑하기 때문이고,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온통 아름답게/처절하게 노래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법 높고 크고 어여쁜 줄로 알게 하기 때문이며, 마침내 그 착각이 부분부분 현실로 변화하는 마법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자, 저들은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인가요, 위대한 교사요 마법사인가요?
헷갈린다면 착각여관에 들러 하룻밤 아니, 사흘 밤을 묵어 가기 바랍니다. 그 어떤 몬스터호텔도 이보다 더한 모험을 선사하지는 못할 것이며, 그 어떤 비극도 이보다 더한 비통을 선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손길도 이 위로를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는 착각여관이니까요.
休